가늘고 길게 살기. 이 말은 지난날 우리가 어느 청춘의 길목에서 한 번쯤 호기와 농을 섞어 말하던, 인생은 굵고 짧게라는 당돌함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변방의 아우성 같은 말이자 한때 삶의 서글픈 마이너리티를 대변하는 일종의 쓸쓸한 위안이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낙담을 상정한 변명이자 포기였으며 까치발로 서보아도 힘에 부치는 이류나 삼류의 탄식이 일말의 패배감을 안고 선택해야 하는, 무기력을 포함한 자족의 한숨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아마도 그것은 만족스럽지 못한 처지와 기반에 대한 묘한 반감이자 위축에 대한 오기 같은 것, 허풍을 상대로 궐기하는 침묵의 시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건 삶이 마치 어떤 명쾌한 요약이나 함축처럼 하나의 선명한 의미로 부각되어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그래서 주먹을 불끈 쥐고 두 눈에 힘을 준 채 다소 비장함을 섞어 그럴싸한 무엇인가를 내놓고자 기를 썼던 생에 대한 해학적 오해 혹은 착시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사유를 뒤집어 안쪽의 실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굵고 짧게라는 것이 지니는 강력한 한방의 내력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살지 않는 생의 전반이 억울하거나 쓸쓸하다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수두룩하니 말이다.
벚꽃나무는 따스한 봄날 한때의 꽃사태를 위해 일 년 내내 처량한 고목나무로 살고, 매미는 지루한 몇 해를 죽은 듯 기다려 고작 여름 한철을 몸으로 뜨겁게 달구다 간다. 장황할 것 없이 매일의 밥 한 끼를 보더라도 어머니들은 저녁 식탁을 위해 오후 내내 다듬고 씻고 익기를 기다려 마침내 밥상을 차리신다.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참 모호해지지만 가늘고 길게 살기란 어쩌면 바로 이 아득한 원거리의 환상으로부터 파생하여 끈질기게 진화해 온 생명력의 증거이자 살이에 근접한 고집 같은 것이 아닐까.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희망에의 은근한 열망 같은 것 말이다.
누군가에게 인생은 한 방이고, 누군가에게는 잔술처럼 한 가지씩 오래 걸어가는 길고 긴 여정인 것이다. 이제 한 호흡 쉬면서 다시 바라보니 느린 생애마다 눈물겹다는 것을 알겠다. 가늘고 길게 살기란 결국 불편한 것들에 대한 반격 같은 태도라는 걸, 변명이나 패배감은 더욱 아니라는 걸. 생의 한복판을 조용하고 당당하게 관통하는 정결하고 세밀한 몸짓이며 밥알처럼 끈끈한 풀기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가늘고 길게 사는 일은 그래서 어렵다. 어느 계절의 멋진 하루보다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 하는 것보다도 몇 곱절 더 어렵다. 정말 그렇다. 한 시절의 오해가 풀리고 나면 안개가 걷히고 푸른 새벽이 오는 것이다. 헤겔의 말처럼 저기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녘을 날아오르는 것과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