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슬픔에 대하여
나주 여자를 생각한다. 어느 여름날 인사동 골목에 여럿이 모여 국밥과 모주를 먹던 자리에 뒤늦게 나타나 처음부터 앉아 있던 것처럼 상냥하게 어울리던 여자. 오랜 선배가 가벼운 술판이라며 거듭 청하는 초대에 응했던 자리이고 다들 기다릴 거라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나간 모임에는 예전부터 문학이라는 열병 안에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거나 이름 정도는 서로 익히 보고 듣던, 말하자면 골목길마다 한가닥씩 하며 껌 좀 씹던 이들이기에 적당히 머쓱하고 적당히 체면을 차린 소개를 시작으로 한자리 얻어 앉게 되었다. 그날의 나는 종각에서 전철을 내려 인사동 골목까지 걸었고 습하고 더운 날씨 때문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재킷 속의 푸른 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있어서 할 수 없이 재킷까지 그대로 입고 앉아 그렇지 않아도 더운데 더운 국밥과 더운 모주를 먹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가져왔다는 진득한 모주를 몇 순배쯤 마시고 있을 때 등 뒤로 문이 열리고 씩씩하게 웃으며 등장한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오는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은근슬쩍 처음 보는 사람이 있다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또다시 그 적당히 머쓱하고 적당히 체면을 차린 소개를 한 후에야 앉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 또한 그곳 동인 사이트에서 그리고 골동품점 같던 나의 글집에서 몇 번의 감상과 교류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본 성품은 당차 보였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에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은근히 이랬시유 저랬시유 느린 충청도 말투가 있네요' 했을 때에는 억울한 표정으로 '여즉 살면서 그런 얘기는 당최 처음 듣는구먼유' 하며 귀엽게 발끈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내가 머물던 모임에 그녀가 놀러 왔을 적에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몇 번이고 소개를 하게 만들어 이때의 소심한 복수를 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알아갈수록 의외로 자주 슬펐고 가끔은 지나치게 쓸쓸했다. 물론 그녀는 그때 누군가와 헤어지는 중이었고 개인사는 충분히 쓸쓸하기도 했지만 감꽃이 작은 바람을 못 이겨 그 작은 체구로 톡톡 기척을 내며 떨어지던 어느 와인바 야외 테이블에서 살아온 탁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할 때도, 포장마차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끊임없이 이어지던 글쓰기에 대한 우리의 지루하고 어설픈 강박들을 듣고 있던 날에도, 눈이 오던 날 한잔만 더하자며 들어간 어느 선술집에서 복어꼬리 향이 은근히 퍼지던 뜨거운 히레사케를 마시면서도, 그녀는 슬프기도 공허하기도 한 쓸쓸한 눈빛으로 창밖을 보거나 말이 없었다. 우리들은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어떤 슬픔의 심정적 난입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왈가왈부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우리는 저마다 가만히 자기 몫의 술을 마셨을 뿐이다.
다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떠들썩한 술판은 사라져 갔다. 그녀의 전화를 다시 받은 것은 몇 년이 흐른 뒤, 여느 날처럼 한잔 마시고 집으로 가던 택시 안에서였다. 각자 제법 취기를 안고 만났던 인사동 초입 저 멀리서부터 동네 창피하게 내 이름을 몇 번이나 소리쳐 부르며 손짓하던 반가움과 적당한 쓸쓸함까지 주점 안에 동석을 했던, 별말도 없이 지난 얘기를 하며 보낸 시간이 마지막이었다. 일어서기 전 내가 물었다. 왜 그리 오래 슬퍼하느냐고.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슬픈게 좋아요, 내 옷 같아서... 납득이 가고도 남았다. 슬픈 낯빛을 하고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도 어느 날은 간혹 목젖이 보이게 웃던 여자. 대체로 슬픔에 잔뜩 안겨있거나 그 자체로 슬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던 여자. 여자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전심으로 슬픔과 직면하던 그 마음 때문에, 초점 없는 쓸쓸한 눈빛 때문에, 어쩌면 삶의 전우애 같은 걸 은연중 나누던 슬픔의 전사 같던 사람, 나주 여자.
충청도 남자를 생각한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 때 눈썰매도 털신도 거기 놓아두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온 남자.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지만 아직도 더디고 느린 사투리적 느낌이 몸에 붙어있다는 남자. 어릴 적 고향에서는 무슨 사연들이 그리도 많았기에 자주 틈틈이 처량하고 슬픈 것인지 당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남자. 다음 포털에 칼럼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 연재를 시작한 것이 발톱을 깎는 남자라 명명한 게시판이었다. 몸을 구부려 열중하는 짠한 몸짓을 연상하며 지었던. 그 당시 알게 된 한 친구와 정말 글을 잘 쓰던 친구 까뮈까지 해서 후일 한창 슬플 때의 나주 여자와 몇 번의 술자리를 함께 한 적도 있으니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참 도통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슬픔의 강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기도 했지만, 그때 내가 좀 울기도 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슬픈 여자들이 모여 밥과 술을 먹을 때는 꼭 그렇지만도 않아서 술값이 솔찬히 깨진 것은 기억나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이쯤 되면 적어도 몇 가지는 명확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쓸쓸하고 슬픈 감정을 피하려 애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작심하고 뛰어들기도 한다는 것. 슬픈 영화처럼 노래처럼 깊이 흠뻑 젖어가는 와중에 더 굳은살이 박이기도 한다는 것. 마냥 지지리 궁상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시작하고 고여가는 하나의 깊은 우물이라는 것 말이다. 짠내 나는 우물 속에는 사랑처럼 가질 수 없어 슬픈 것들과 고된 밥벌이 같은 것들과 더러워서 참고 말던 불편부당하고 억울한 것들이 속 없이 뒤섞여 고여 있었다. 한바탕 울고 나서 오기가 생기면 힘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슬픔은 기쁨보다 더 기뻤다. 찬란했고 친밀했으며 당당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슬픔은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순간이 오기도 하는데, 그때 그것을 디딤돌 삼아 탁 차고 오르면 가뿐히 이단 헛발질도 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삶은 조금씩 더 이상 울상이 아닌 사람의 그것이 되어갔다.
지난 날의 나주 여자처럼 나는 슬픈 것들이 좋다. 처량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슬퍼져서는 힘을 내려고. 그러니 이제 잠시 숨을 고르고 슬픔 아웃이 아니라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면서 어느 낭만적인 슬픔에 대하여 응원을 보내본다. 우선 슬픈 전사의 심정으로 벌떡 일어나 아무도 없는 방안이지만 주변을 힐끔거리며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스윽 치켜세우고는 무심한 표정과 눈빛으로 요즘 골목마다 난리라는 삐끼삐끼춤을 추어 본다. 망할 놈의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두 팔을 흔들고 있는 내 부적절한 몸매가 너무나도 가관이어서 입버릇처럼 또 마구 슬프기도 하지만, 어쨌든 최대한 시니컬하고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