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어느새 다시 시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 되면 가을은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일 년에 한 번 있는 그럴듯한 기념일로 삼아 스스로의 주름을 조심조심 펴 보는 것인지, 아련한 추억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쓸한 상념을 주제로 심금의 탄주가 시작됩니다. 마치 심란을 기다렸던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점심까지 배불리 잘 먹고 난 다음에 바쁜 오후를 서둘러 보내고 난 후 어스름 저녁이 되면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것처럼 회억의 천막을 치는, 일종의 면벽과도 같은 차분한 마음들을 대하고 있노라면 우리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깊은 수양심 하나씩 품고 살아가는 건 아닌가 싶어 슬며시 경건해지기까지 합니다.               

좀처럼 듣지도 않던 트랜지스터를 켜는 일, 읽지도 않을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한산한 카페에 들어서는 일, 향 좋은 차를 끓여 놓고도 다 식을 때까지 무작정 바라보는 일과 까닭 없는 상념에 퍼뜩 놀라 맹물 맛인 식은 차를 서둘러 마셔 버리고 이내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일, 그러나 밤은 다른 날보다 길고 생각은 눈치 없이 깊은 우물을 파기 일쑤입니다. 점점 말똥해지며 따가워지는 눈 때문에 어둡던 천장이 조금씩 희뿌옇게 밝아지기라도 하면 잠은 다 잤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려는 걸까요, 아니면 어떤 사연 하나씩 방생하려는 걸까요. 혼자 치르는 침묵의 의식은 때때로 아무런 소득 없이 아침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내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랜 행상과 좌판으로 손발이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졌던, 그런 상처에는 식초가 약이라며 바르다 독한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고 눈물까지 글썽이던 그러나 정작 가슴이 아플 때는 울지 않았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 당신이 어느 겨울 나란히 동반가출을 했던 우리 삼 남매를 찾아와서 처음 울었지요. 그래요. 이제는 참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그런 건 조금씩 잊어도 좋겠습니다. 며칠 전 전화를 주셨을 때 퉁명스럽던 내 주둥이를 꼬집어봅니다. 안방의 시들어 가던 난은 다시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가 손수 끓여야 꼭 그 맛인 구수하고 향긋한 냉잇국도 기억합니다. 내년 봄에도 또 서너 사발 욕심내서 먹고 싶습니다.     

          

하이네켄이 너무 싱겁다며 술을 바꾸곤 하던, 바바리코트가 너무도 잘 어울리던 당신을 기억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바바리코트가 원래 무명 개버딘에 방수처리를 한 레인코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하긴 무슨 상관이겠어요.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인데. 이를테면 허름한 주점에서 약한 곰팡이 냄새까지도 거들던 문학판에 대한 뒷담화들, 또 만취한 울분의 밤들, 상처와 치유를 떠들던 오랜 날들 말입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우린 만난 적 없지요. 당신이 글을 쓰던 이십 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신문에서 당신 소식을 보며 멍하니 웃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간간이 세 번인지 네 번인지 출판기념회를 구실로 내게 기별을 주었을 때도 가지 못한 것 이해하리라 믿어요. 이건 be동사에 진솔한 마음을 얹은 미안함이자 더 큰 날을 바라는 축원이라는 걸 당신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날이 밝고 있습니다. 간밤의 일들은 다시 속주머니 깊숙한 곳에 들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모든 묘한 일들이 단지 저 유명한 노랫말 하나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마음이 석연치 않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은 어쩌면 모진 살이의 한 겨울을 잘 나게 하는 독감 예방주사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고단한 행로에 여기저기 망가져 있는 마디마다 연장을 들어 숨통을 트이게 하는 비방문 같은 것 말입니다. 다행인 것은 삼백예순 날 중 몇 번은 이 밤과 같을 것이니, 기억을 울리고 나가는 심금의 가락은 명징한 떨림으로 오래오래 남아 우리를 버티게 할 것이며 생을 조율해 나가는 산조가 되고 콧노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청승은 나의 힘이고 또 소심은 삶을 조금 더 따듯하게 토렴 하는 이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