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에도 더덕을 한 소쿠리 캤다. 굵게 자라서 먹기 좋은 것은 따로 떼어놓고, 손가락만큼 작은 것들은 다시 심기 위해 모아 두었다. 2월 중하순, 봄이라 하기엔 이르고 겨울은 이제 저만큼 물러간 것이 아닐까 기대되는 시기에 더덕 수확을 한다. 어머니의 텃밭 한 자락을 빌려 더덕을 심기 시작한 것은 대략 7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홍천에 사는 지인의 집에 놀러 갔다가 주변에 흩어져 자라는 것을 보았는데 가느다랗고 섬세한 줄기며 매끈하면서도 단정한 네 개의 잎을 가진 모양새에 그만 푹 빠져버렸다. 알싸한 듯 향긋한 냄새는 또 어떻고. 그렇게 지인으로부터 얻어온 몇 뿌리를 어머니의 텃밭에 심는 것으로 나의 더덕 농사가 시작되었다.
더덕은 봄여름 내 넝쿨을 이루며 가지를 무성하게 뻗다가 가을이 될 무렵 보라색의 예쁜 꽃을 피운다. 초롱꽃마냥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고운 모습으로 한동안 즐거움을 주고는 늦가을이면 씨를 맺는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이듬해 봄이면 발아하기에 해를 거듭할수록 내 밭도 점차 풍성해졌다. 그저 예쁘고 흐뭇한 마음에 화초 보듯 키우기만 했는데 3년쯤 지난 어느 날, 무성한 줄기의 잘 자란 더덕들이 싹 사라져 버렸다. 외부인이 담장 안 텃밭에 들어왔을 리는 없고 가족 중 누군가가 캐어버린 것도 아니라는데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제야 이리저리 알아보니 밭 더덕은 3년 이상을 키우면 뿌리가 곧잘 녹아버린다고 한다. 수확을 하기보다는 마냥 두고 오래 보려 했는데 내 밭에선 그리하기가 적절하지 않은가 보다. 이후로는 2월이면 아쉬움 없이 더덕을 캔다. 흙은 씻어 흘려보내고 끈끈한 진액이 흐르는 껍질은 조심스레 벗겨낸다. 오래 공을 들여 마침내 말끔한 자태를 보게 되면 이번엔 방망이로 살살 두들겨 먹기 좋도록 부드럽게 다져 놓는다. 붉은색 고추장에 설탕과 참기름 매실액 등 갖은양념을 넣어 잘 섞어주고 손질 끝난 더덕을 한 켜 한 켜 쌓아가며 조물조물 무치면 언제 먹어도 입맛을 돋우는 더덕무침이 완성이다.
더덕을 다 캐고 나면 밭을 뒤집어 고랑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물 빠짐이 좋아야 하기에 둔덕도 높이 쌓아 올린다. 봉긋하고 단정하게 모양을 잡고 난 후엔 남겨 놓은 작은 것들을 심는다. 그날도 모든 일을 하루에 끝내려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이제 심는 일만 남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더덕 밭 만들기를 반대하고 나섰다. 작년 가을, 유난히 풍성했던 더덕 꽃에 몰려든 벌들을 보고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엄지손가락만큼 커다란 말벌이 떼로 몰려드는 바람에 119를 부르는 소동까지 일었다고 한다. 타협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올해 가을엔 꽃이 피면 일찌감치 따버리겠다고 해보았지만, 어머니는 끝내 고랑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벌도 무섭거니와 먹고 싶을 땐 장에 가서 한 번씩 사 먹으면 그만이라며 되려 나를 설득한다. 고작 한 바구니의 더덕을 위해 굳이 일 년의 수고를 왜 하느냐고 급기야 역정을 냈다. 하지만 일 년 동안 땅 한 자락을 고스란히 내어주고 온갖 수고를 들여 가며 내가 얻는 것은 그저 한 접시의 찬이 아니다. 계절에 따라 싹이 나고 줄기를 이루고 그 굵기로 작물의 크기를 가늠하며 다음 해 2월이 오기를 기다리는, 경작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는 보물을 품은, 겨울에도 결코 황량하지만은 않은 텃밭을 갖게 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마주하게 될 한 접시의 향긋한 더덕무침을 생각하며, 기꺼이 추운 겨울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찬으로써 상에 오르는 날에는 그 안에 깃든 지난 일 년의 기다림과 수고, 그간의 비, 바람, 햇살 모두를 함께 먹는 것이다.
한 해 한번, 아직 얼음이 완전히 녹지 않은 언 땅을 뒤집어 가며 내 손으로 캐어내는 재미가 특별했는데 이제 더 이상 심을 수 없다니 마지막 수확, 마지막 더덕무침에 마음이 섭섭하다. 그나저나 이미 솎아 둔 것들은 어찌한다? 심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마침 이웃이 마실을 왔다. 나와 어머니의 실랑이를 곁에서 지켜보다가 ‘혹시 가져가 키우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냉큼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올해 심는다면 내년엔 제법 먹기 좋은 크기로 자라게 될 더덕들이 그렇게 이웃에게 들려 그의 밭으로 갔다. 무척 아쉽지만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의 땅에서 성장을 이어갈 기회를 얻었으니,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런데 가만있자, 봄이 되면 분명 텃밭에 떨어진 더덕 씨앗에서 새싹이 올라올 텐데. 옳거니, 그때는 몰래 캐어다 어머니 눈에 띄지 않을 은밀한 장소로 옮겨두어야지. 그곳에서 나의 비밀도 기대도 함께 키워야겠다.
월간 수필 문학 5월 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