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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Nov 16. 2019

뮌헨에서 만난 '사람'

배낭 분실 참사 그리고 지팡이 요정


 20년 전 혼자 배낭을 메고 유럽에 왔을 때, 브런치에서 소중한 인연이 된 '마리 오유정' 작가님이 사시는 그곳, 뮌헨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런던에서 크리스틴의 노래에 취해있다가, 매력이 넘치던 암스테르담을 거쳐 낭만을 주체할 수 없던 프라하를 지나 뮌헨에 도착하였다. 뮌헨을 들렸던 이유는 하나,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 꼭 갔어야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법. 뮌헨역 락카에 내 소중한 배낭을 넣어둔 채로 룰루랄라 성에 다녀오고 난 저녁 일이 터지고 말았다. 락카에 들어있어야 할 내 배낭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니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는 거였다.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옷가지들, 소중한 물건들, 사진이 담긴 필름들, 내 일기장. 무엇보다 40일의 여행을 계획하고 온 나에게 그날은 채 열흘이 되지 않던 날이었다.
 
하지만 이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도 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그날 밤 묵을 숙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배낭 분실이라는 대사건 앞에 나는 경찰서를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허비했었기에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기에 빨리 숙소를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성수기였던 여름, 남아있는 숙소들은 죄다 비싼 호텔방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몇 군데를 둘러보다 지친 나는 그냥 좀 앉아 쉬고 싶었다. 


뮌헨 시청사 광장, 지팡이 요정을 만난 곳 


 어두워진 거리. 나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만 했다. 불빛이 환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 나는 다시 뮌헨 시청 광장으로 와 계단에 철퍼덕 쭈그리고 앉았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찔끔거렸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앞이 깜깜했다. 어떻게 온 유럽인데. 


그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다가 문득 신기한 순간을 만났다. 소중했던 물건들을 다 잃고 나니,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순간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무릎을 쳤다! 나는 왜 거기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으니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걸. 그 순간의 해방감이 충만함이 되어 나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마법처럼 지팡이를 든 요정이 나타났다.


길바닥에 힘없이 앉아있던 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너 근데 무슨 고민이 있어 보여. 괜찮니?" 누굴까. 그 아이 얼굴을 보았다. 세상 착하고 맑은 얼굴. 마음이 바로 누그러졌다. "응. 사실 나 배낭을 잃어버려서 갈 데가 없어서 이러고 있어"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괜찮으면 오늘 밤 우리 집에 가서 묵지 않을래? 너만 괜찮다면..." 그 친구 옆에는 여자 친구로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둘 다 뮌헨에서 공부 중인 일본인 유학생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더구나 그 아이 얼굴은 '위험한 늑대'와는 아주 거리가 먼 선함만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나의 '촉'을 믿기에 바로 그 아이들을 따라나섰다. 나츠키와 유키꼬.
나츠키는 내게 자신의 침대를 내어주고 자기는 다른 방에서 바닥에 요를 깔고 잤다. 그날의 모든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나는 바로 곯아떨어졌고 다음날 늦잠을 잤다. 


뮌헨 시청사 광장의 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키꼬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고 나츠키는 아침을 챙기고 있었다. 잘 구워진 토스트와 따뜻한 차 과일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식탁.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는데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츠키는 말했다. 3일 정도가 지나면 배낭을 찾을 수도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며 자기들이랑 같이 지내자고. 서류나 언어문제는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나는 그들과 3일을 꼬박 함께 보냈다. 낮에는 여기저기를 함께 돌아다니기도 하였고 저녁이면 일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츠키가 가져다주는 맛있는 초밥 도시락을 먹었다. 그리고 우리 셋은 밤마다 함께 맥주를 마셨다. 알고보니 둘은 사귀는 게 아니라 그냥 친구 사이였다. 그들은 내게 한국인 친구도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나보다 열 살은 족히 많은 조각가였는데 나를 보더니 고향 동생을 만난 듯 반가워하였고, 우리 셋을 모두 근사한 레스토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그 세 명의 친구들은 나에게 그들의 재산을 탈탈 털어주었다.  


"너는 계속 여행을 해야만 해" 조각가 분은 자기는 이미 모든 곳을 다 다녀봐서 필요 없다며 내게 흔쾌히 자기의 배낭을 내어주었다. 손톱깎기, 휴대용 헤어드라이기, 티셔츠들과 세면도구들, 유키꼬는 속옷들까지 챙겨주었다. 그렇게 나는 졸지에, 옷가지들과 배낭까지 새로 생겨나 다시 여행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3일이 지났고 내가 떠나기로 한 날의 마지막 밤이 왔다. 나츠키와 유키꼬는 나를 위해 멋진 저녁을 준비해주었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맥주를 마셨다. 
떠나기 싫다는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 했다. 그리고... 술이 약한 유키꼬가 갑자기 뻗어버렸다. 나츠키는 나에게 뭘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부엌을 계속 왔다 갔다 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 고맙고 예뻐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돌로 만든 새로운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


 순간 나츠키와 눈이 마주쳤다. 나츠키는 나에게 다가와 키스를 하였다. 

다음날 나는 둘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역으로 향하였다. 유키꼬는 해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실은 나 나츠키를 좋아하고 있어"  '미안해 유키꼬. 너의 그 예쁜 미소를 잊지 못할 거야' 
 
 지금도 나츠키는 뮌헨에 있을까? 일본으로 돌아갔을까? 뮌헨에 계시는 작가님에게서 뮌헨 소식이 전해올 때마다 가끔 그때가 생각난다. 내 40일간의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다른 어떤 근사한 것들보다 그들과 함께한 3일이었기에. 아름다운 짤즈캄머구트 언덕을 오르며 혼자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송을 부르던 순간보다도 더 깊이 각인되어 있던 시간. 
 
그때 알았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란 것을. 함께 나눈 그 '마음'이란 것을.
   
한 번쯤 다시 가보고 싶다. 처음 나츠키와 유키꼬를 만났던 뮌헨 시청사 그 광장을. 그리고 그때의 그 마음들을 만나면 전해주고 싶다. 고마웠다고. 너희들이 내민 손은 따뜻했다고. 우리의 그 여름은 아름다웠다고.



한참 지나고서야 알았다. 그 때 내가 한 것은 엄밀히 말해 '진짜 여행'은 아니었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 때 다하지 못한 '진짜 여행'을 하기 위해. 10년 후 다시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여행.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 '진짜 여행'을 시작하고 만난 인연, 뮌헨의
 '마리 오유정' 작가님 브런치 : https://brunch.co.kr/@mariandbook


 * 메인 그림 : Chag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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