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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May 22. 2019

맨발로 뛰쳐나와 안착한 유럽
'소화불량의 땅'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3화


 동양에서 온 무일푼 여자가 유럽 부르주아 집안에 들어가다니. 이건 사실 말이 안 되는 결합이었다.

 알다시피 '가진 자들'에게 결혼이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여기도 다르지 않다. 시댁은 이 나라에서도 일명 '뼈대 있는 가문의 성씨'를 가진, 이 나라 사람들조차 인정하는 '품격 있는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서민 집안의, 그마저도 아버지는 파산한, 이 사람들 시선에서 보자면 '전쟁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변방의 힘없는 나라, '듣보잡 나라의 여자애'였다. 그래 이 표현이 딱 맞았다. 남편이 부르주아 집안 외아들인 것을 알고 만난 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나를 받아들여야 했던 시어머니 심정이 그랬을 테니. 
  
 더구나 이들의 '공고한 부르주아 개념'은 우리 사회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그 집안의 며느리로 받아들여짐'의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헤아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는 그저 '불타 잿더미만 남은 집'을 맨발로 헐레벌떡 뛰쳐나와, 숯검댕이가 아직 묻어있던 멍한 얼굴로 내가 안착할 '다른 땅'의 촉감을 막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가방 하나 달랑 가져온 나를 보며 누군가는 무슨 배짱이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내 몸 하나 말고는 가져올 수 있는 다른 것이 없었다. 쪽방 생활을 하던 서울의 직장 생활 동안 돈을 모으는 게 불가능했을뿐더러, 그나마 목돈이라고 있던 퇴직금은 생활 빚을 청산하는데 다 썼다. 더구나 아빠의 파산으로 가족들은 정신적 충격을 감내하며 일상을 살아내느라 내 결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딸 결혼인데, 부모님께 비행기 티켓 끊어드리며 결혼식에 오시라고 초대는 했어야 했건만 나는 그러지조차 못했다.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딸 결혼식에도 가지 못한 부모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한 마음뿐이지만, 언제나처럼 어리석음은 후회를 낳고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그저 어서 '공식 절차들'이 끝나기를 바랐건만, 모든 행정절차가 복잡하고 느린 이 나라에서의 결혼은 참으로 지리멸렬한 기다림의 시간들을 선사했다. 결혼식을 신청하면 최소 3달이 지나야 식을 올릴 수 있었기에 여기에 집이 없던 우리는 시부모님 집에서 꼬박 3달을 함께 보내야 했고 그 석 달은,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뛰쳐나와 맨발로 건너온 나를 정신이 들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엔 '모든 게 다 좋아 보였다'. 집은 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집안의 사물들은 정확하게 있어야 할 곳에 놓여있었다. 모든 것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기에 흡사 서양화 속에서나 보던 정물화나 풍경화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많은 정성을 들인 처음 맛보는 음식들은 새로움을 발견하는 설렘을 주었고, 다양하고 맛있는 치즈들은 호기심 많은 미식가인 나의 입을 즐겁게 하였다. 무엇보다 '시댁'이라고 해서 '며느리'가 부엌일을 해야 하는 편견 없이 시어머니가 꼬박꼬박 밥을 해주는 것이 참 맘에 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발견의 즐거움'이 '생활의 불편함'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데는 채 열흘이 걸리지 않았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그 옷에 나를 맞추기


 가장 먼저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먹는 것'이었다. 쌀 한 톨 없이 매일같이 빵과 면을 기본 주식으로 한채 크림소스나 버터로 조리한 음식들을 끼니마다 먹어야 했기에 우선 소화가 잘 되질 않았다. 더구나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와는 달리 이 집은 '고기만 먹는' 집이었다.

 처음엔 그럴듯한 양고기나 비둘기 고기, 토끼 고기들을 식탁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그러나 정신이 돌아올수록 고기들에서 나는 '잡내'가 우리가 먹던 고기음식과 달리 꽤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후각이 예민한 나는 그 냄새들 때문에라도 밥을 먹고 싶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먹고 싶지 않은 밥을 먹고 나면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 곧바로 이어지는 디저트 타임의 온갖 후식들은 죄다 설탕을 부어 넣은듯한 무쓰 케이크나 무쓰 초콜릿 또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하필 나는 단 것도 찬 것도 초콜릿도 안 좋아한다. 그렇게 내 몸에 맞지도 않는 것들을 꾸역꾸역 쑤셔 넣느라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고 일주일여가 지나자 드디어 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나는 소화불량에 걸렸고 화장실을 갈 수 없었으며 숙면을 취할 수 없었고 계속 몸이 부어올랐다. 몸무게는 폭증하여 결국, 남들은 일부러 다이어트도 하는 결혼식날 나는 '내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은 채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불편함은 모든 것에 걸쳐있었다. 늘 정돈되어있는 '깔끔한 집'은 보기에만 좋은 떡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 댁 욕실에는 물 한 방울이 없었고, 세면대를 사용한 후에는 언제나 스펀지로 모든 물기를 깨끗이 닦고 나와야 했다. 욕실 바닥에 배수구멍이 없는 이 나라 특성상 기본적으로 욕실에 물기가 없긴 하지만 '호텔처럼 반짝이는 욕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설거지 감은 그때그때 씻어 바로 행주로 물기를 닦은 후 즉각 정리해놓아야 했으며 싱크대는 늘 깨끗이 비어있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괴롭게 했던 건, 그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던 무의미한 수다'를 꼼짝없이 지켜봐야 하는 '끝나지 않는 식사시간'이었다.

 우선 밥을 먹자고 한번 앉으면 최소 2시간은 앉아있어야 했는데, 전식에 앞서 거실에서 식전 술이나 음료를 마시며 간단한 주전부리 하는데 30분, 본격적으로 식탁에 앉아 전식 본식 후식을 먹는 데까지 1시간, 그대로 앉아 커피타임 30분, '꼼짝 마' 자세로 앉아있던 그 시간들 동안 그들은 마치 이제 막 말이 트인 아이들마냥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물론 나는 그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대화의 형태나 흐름 분위기는 금방 간파할 수 있었다. 먹고는 있는데 소화는 안되고 저들은 한껏 떠들어대는데 시간은 안 가고.
그마저도 손님이 와서 접대를 하는 식사자리 이기라도 하면 그 시간은 한없이 늘어났다. 4시간이고 5시간이고 의자에 붙어있는 채로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시간들. 밥 한 끼 먹는 것이 이렇게 고문이 될 줄이야. 


 배고프면 배를 채우면 되고 졸리면 눈을 붙이면 되건만, 이 나라는 밥 먹는데도 뭐가 그리 지켜야 할게 많은지 매번 절차도 많고 형식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 나라가 자랑하는 '전통'이었고 이 땅에 발 디딘 '이방인'인 나는 그 전통을 존중하고 따라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점점 나를 지치게 했고 외롭게 했으며, 결국 이 땅에서의 불행을 가져온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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