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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May 12. 2019

나의 결핍을 한방에 잠재워주었던
'풍요로움'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2화


 그랬다. 나는 '그것들'이 갖고 싶었다. 나는 '그들의 것'에 속하고 싶었다. 나는 '그들 안에' 편입되기를 바랐다. 쉼 없이 솟아오르는 마법의 샘처럼, 마르지 않는 그들의 풍요로움 속으로.


 원래 결혼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었다. 더구나 왜곡돼버린 관습이 남아있다 못해 '시어머니를 받들고' 살 확률이 여전히 높은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한다는 것은, 구속되는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착한 유럽 남자'를 만났을 때, 내 마음은 완전히 달라졌다.
 
 몹쓸 유교적 관습이나 편견 따위를 아예 모르는 딴 세상의 남자라면, 착한 외국 남자라면 결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무렵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훤칠했고 늘 웃는 얼굴이었으며, 무엇보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한국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해외여행은 몇 번 해봤어도 외국에서 생활한 적이 없던 나로서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그의 몸에 밴 작은 매너들과 습관들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고, 그것들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남성상의 어떤 일그러진 모습 이를테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억압적인' 모습들과 극명하게 대비되었기에 그저 내 눈엔 '매우 옳아'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가 한국에 없었기에 '원정 연애'의 물리적 거리감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던 겨울, 그는 내게 그의 나라를 방문하여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이미 사랑에 빠져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으며, 더구나 그의 제안은 그를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오래전 배낭여행으로 잠깐 가봤던 그곳을 다시 간다는 설렘으로 나는 그 겨울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첫 방문은, 잊고 있던 내 안의 '욕망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것은 내가 가져보지 못한 어떤 마음, 무언가가 사무치게 갖고 싶고 욕심이 나는 마음이었고, 그것은 '그들이 가진 모든 풍요로움'이었다. 내 눈에 비친 그것들은 위태롭던 나를 다시 살리고 안전하게 지탱해주기에 너무도 충분한 것들이었기에.  
 

부르주아 삶 안으로 편입된다는 것


 첫 방문지인 그의 부모님 집에서부터 나는 '그들의 풍요로움'에 압도되어 버렸다. 

 천정이 높은 커다란 응접실에는 정원이 보이는 큰 창과 넉넉한 수량의 고급 가죽소파들이 손님인 나를 맞이해주었고, 커다란 그림 액자들과 고가의 장식품들이 한쪽에 놓여있었다. 집안 곳곳에는 정갈한 카펫이 깔려있었고 멋진 조각상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으며, 정원에는 온갖 나무와 꽃들이 그림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모든 것들은 한눈에 봐도 매우 수준 높고 까다로운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정원과 연결된 아뜰리에에서 목격한 모습은 더욱 강렬하였다. 맨발에 가죽 로퍼를 신고 명품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인 채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미래의 시아버지' 모습은 그야말로 '신세계'가 열리는 느낌 그 자체였다. 햇살이 좋은 오후 아버님은 때때로 시가를 문채 정원의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멋진 백발은 더욱 빛이 났다. 


 형제들은 모두가 소위 '가방끈이 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저마다 따뜻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친척들과 친구들 심지어 '우아한' 부모님의 친구분들까지도, 단지 내가 그 집안의 아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편견 없이 나를 반겨주고 맞이해준다는 것이 참으로 신선하였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는 '출신 성분'이나 '출신 학교'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남자 하나 만났을 뿐인데, 갑자기 신분상승이라도 한 듯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했고, 세상의 모든 풍요로움들이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친숙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게 가장 큰 인상을 주었으며 결정적으로 '결혼의 결심'을 이행하게 한 것은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별개로 '사랑이 넘쳐흐르던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적지 않은 수의 가족들이 함께하는 순간들 동안 그들은 큰 소리 한번 내는 것 없이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단지 '함께 있음으로' 참 행복해 보였다. 식탁에 둘러앉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며 그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얘기할 때면 그들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그건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끈끈한 유대감이었다. 


 한국에서조차 보기 드문 가족의 분위기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이 넘치는 가족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니 넘치는 사랑을 내게 줄 수 있으리라고. 그토록 갖고 싶었으나 제대로 가져본 적 없던 '사랑의 결핍'을 이 사람이라면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그들이 가진 모든 풍요로움 중에서 내가 가장 갖고 싶던 것은 그것이었다. 그 이유는 성장과정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삶의 바닥에서 허덕이던' 당시의 내 상황들에 있었다. 당시의 나는, 내 안의 가치들과 믿음들이 전복된 채 정신적인 공황상태를 겪고 있었고, 배신감을 감내해야 했으며, 사기를 당해 집이 넘어갔던 아빠는 파산을 한 상태였다. 안 그래도 바람 잘날 없던 나는 더욱 나약하게 무너져만 갔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저들의 '안전한 풍요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지옥의 한 복판에서 나를 구할 단 하나의 길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들'에 속함으로써 '모든 나'를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정말로 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 땅에 왔다.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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