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촛대와 꽃으로 장식된 식탁, 멋지게 세팅된 음식, 빛나는 와인잔 그리고 잔잔한 미소가 곁들여진 대화. ‘프랑스 식탁’ 하면 의례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풍요와 교양이 어우러진 고급스러움을 연상시키고 어딘지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이것이 프랑스다’라는 듯.
중세 유럽은 ‘암흑기’를 보냈다. 그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은 비단 불결한 위생개념과 그로 인한 전염병 창궐에만 있지 않았다. 당연히 모든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식문화는 중세의 문화 척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때의 프랑스 식탁은 분명 지금 같은 고상함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더구나
불과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식탁에는 다양한 음식은커녕 접시도 포크도 없었으며 그들이 손으로 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허약한 인식에 기대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스인들이 암흑기를 벗어난 건 당시 월등하게 문명이 발달해 있던 이탈리아 덕분이었다. 유럽의 르네상스 자체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이탈리아의 선진문명 전파로 프랑스가 그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실제 프랑스는 15세기까지 영국과의 백년전쟁이나 장미전쟁 등으로 살육전에 몰입해 있었지 문명의 발달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해상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문화적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실제 당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파리보다 훨씬 앞선 문화를 누렸으며 활발한 상업으로 금융업이 발달하였다. 그 중심에 있던 피렌체 부호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르네상스가 발원하게 된다.
프랑스가 말 그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그 메디치가의 손길이었다. 1553년 메디치 가문의 딸인 ‘카트린 드 메디치’의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의 결혼이다.
메디치 가문은 엄청난 부로 예술가들을 지원하였는데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후원자였고, 후에 프랑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등 유럽 전체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가문이었다. 그러한 가문의 여인이 프랑스에 오면서 함께 가져온 것은 당연히 이탈리아 최고의 문명이었다. 그녀는 화려한 식기들과 훌륭한 주방용품들 그리고 개인 요리사들을 대동하여 다채로운 조리법과 세련된 식탁예절 등을 프랑스에 전수해주었다. 이후 파리에 요리학교가 생기는 등 프랑스에 대대적인 ‘음식 개혁’이 일어난다.
이때 프랑스인들에게 처음으로 포크가 소개되었다. 그전까지 프랑스인들은 고깃덩어리를 그냥 손으로 들고 먹거나 걸쭉한 죽을 그릇째로 들고 마시는 것이 식사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쟁반에 담겨 나오는 큰 고기는 잘라서 주기 때문에 개인용 나이프가 따로 필요 없었고, 수프를 뜨는 공용 국자 말고는 개인 숟가락도 없었다. 이처럼 중세 프랑스인들과 유럽인은 개인 접시나 그릇 없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맨손 식사’를 하였다.
물 대신 마시던 술잔도 공용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타랑쇼와르'라 불리던 판자 모양의 딱딱한 빵 위에 음식을 놓고 먹었는데, 국물을 흡수하기에 말랑해지면 교체되었고 식사 후엔 하인이나 개에게 주었다. 포크가 정착된 것은 훨씬 후였다. 면 요리는 이탈리아에서만 먹었을 뿐 아니라 포크 형태가 무기를 연상시켰기에 혐오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숟가락 포크 나이프’ 세트가 갖춰진 것은 18세기가 다 되어서다. 또한 한 접시씩 나오는 풀코스 서빙은 원래 러시아 방식으로 프랑스가 모방한 것이었다.
빈약한 식기 도구들만큼이나 식재료도 빈약하였다. 귀족의 식사는 고기와 밀로 만든 하얀빵과 치즈, 와인, 계란 정도였으며, 농민들은 보리로 만든 검은빵과 콩, 채소를 뭉근하게 끓인 수프와 가끔 염장 돼지고기를 맥주와 먹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난한 농민들은 가축 사료로 재배한 귀리를 죽으로 쑤어 먹었다. 귀족들은 권력의 상징인 고기에 집착하였는데 큰 실수를 한 귀족에게는 ‘평생 고기금지’라는 벌이 주어질 만큼 고기는 곧 귀족을 의미했으며 귀족들은 채소를 먹지 않았다. 중세 유럽인들에게 채소는 친밀한 재료가 아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먹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채소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양배추와 순무, 양파, 당근, 병아리콩, 마늘 정도가 다였으며 재배되던 과일도 사과가 전부였다. 여기에 이들의 화장실 문화에 대한 실마리가 있다. 오물이 퇴비가 되어 생장으로 이어지는 ‘순환 원리’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분뇨를 따로 모아 놓는 ‘뒷간’ 개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지 못했기에 열악한 환경에서 다양한 채소를 길러 먹을 수 없었고 화장실 문화 또한 배설의 형태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귀족이나 왕후들이 채소를 먹기 시작한 건 16세기 이후였으며, 유럽인들 식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감자, 토마토, 호박 역시 옥수수, 고구마 등과 함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작물이다. 이처럼 오늘날 프랑스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들은 불과 400년 전 생겨난 음식들이 대부분이며, 프랑스 요리에 들어가는 각종 향신료 또한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당시 유럽보다 발달된 문명이었던 이슬람 문화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더구나 중세는 인구의 90%가 농민이었다. 그 말은 프랑스인들 대부분은, 고기는 제대로 구경도 못 해본 채 귀리 죽이나 양파 수프를 흙 묻은 손으로 먹던 사람들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천년을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신문물이 주어졌다 하여 그것이 공동체 전체의 삶과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르네상스 시대에 정립된 것이라 해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서민들 식탁은 ‘감자 먹는 사람들’ 모습이 다수였다. 그렇기에 현재 알려진 '프랑스 요리'는 귀족의 산물일 뿐 절대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화가 될 수 없다.
이처럼 ‘세계 미식의 기준’이라는 프랑스 음식 문화는, 프랑스 고유문화라기보다 외국 문물을 받아들인 결과였으며, 프랑스인 전체가 아닌 일부 귀족문화를 이식한 것이다.
15세기 한국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기로 밥과 국과 다양한 반찬을 각종 그릇에 정갈하게 차려 먹었었다. 심지어 프랑스가 막 생겨난 5세기의 고구려만 해도 이미 숟가락과 젓가락, 개인용 식기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쌀, 콩, 조, 보리, 기장, 수수, 밀 등을 농사지어 먹었다. 채소로는 배추, 상추, 무, 콩잎, 아욱, 오이, 박 등을, 과일로는 복숭아, 배, 밤, 자두 등을 재배해 먹었으며 미역과 같은 해초류를 먹었다. 나아가 된장 간장 김치를 담가 먹었으며 불고기의 시조인 맥적을 즐겨 먹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 음식인 김치, 불고기, 된장이 이미 고구려 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음식 문화는 그 사회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음식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정신이 그대로 반영되고, 생활수준과 문명 발달 정도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과 고대 한국, 어느 사회가 더 문명적이었고 발달된 문화를 가졌었는지는 당시의 식탁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럼에도 ‘세계 최고 음식 문화’는 왜 늘 프랑스여야 하는지, 이제는 의문을 제기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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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 중세 시대 > Mikael Eskelner http://bitly.kr/zlp3NNTLtJu, 중세 요리 위키백과 영문 자료 http://bitly.kr/dv45pllh37v2, 중세 식탁 영문 자료 http://bitly.kr/BXR5VvEgrUO, 이탈리아 요리가 프랑스 요리에 미친 영향. 뉴욕타임즈 기사 http://bitly.kr/FnBTRhO1f5O, 카트린 드 메디치 위키백과 http://bitly.kr/2CumW6NMaRL, 중세 유럽의 식문화 Prezi.com 자료 http://bitly.kr/eIsUEgC6DtW, http://bitly.kr/0PTonNN8LaW, http://bitly.kr/vhVmF0ZCAM5, http://bitly.kr/Udk3J50BS7B, 중세의 음식 자료 http://bitly.kr/vJIe69ZWAM8, 고구려 음식문화 http://bitly.kr/J6bdd7XRMYG, 고구려 무용총 음식문화 해설 http://bitly.kr/V7jNrSauvEK, 고려 음식복원 사진과 기사 http://bitly.kr/fJAkUPERPd2
* 고려시대 음식 복원 사진에 있는 고춧가루에 대하여 : 고춧가루 유래가 임진왜란 이후라는 설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연구와 발표가 이미 수차례 있어왔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고문헌들에 임진왜란 이전 고추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기록들이 수없이 나오며, 아메리카에서 건너간 피망이 한국 토종 고추가되어 이토록 다양한 한국 고추로 변종되고, 수많은 고추 관련 전통 음식들이 생겨나고, 특히 고추장이라는 발효음식이 생겨나기까지. 이 모든 것이 겨우 400년만에 생겨날 수 있는 문화 산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더구나 일본 음식문화에는 고추가 없고요.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러한 추론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근거 자료 - 고추 전래설의 진실? 임진왜란 전파설 뒤집기 기사 http://bitly.kr/X8XIK8vJ9QI : 한국식품연구원 박사 권대영님의 주제발표와 6명의 전문가가 모여 토론한 '고추 전래 진실'이라는 세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