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레스토랑. 이름만으로도 모두의 선망과 찬양이 뒤따라오는 곳. 가장 훌륭한 서양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곳. 음식 문화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는 나라. 대체 ‘세계 미식의 기준’이라는 프랑스에는 어떤 음식이 있다는 걸까.
하지만 프랑스에 사는 나는 정작 프랑스 레스토랑에 가는 것이 불편하다. 불필요하게 엄숙한 분위기와 형식으로 점철된 식탁 예절. 그들의 고상함은 밥을 먹는다기보다 우아한 사교장을 연상시켰고 언제나 ‘우아한 인내’를 요구했다. 끝도 없는 대화와 끝나지 않는 식사. 밥 한 끼 먹으러 갔다가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것. 이렇듯 딱딱한 식사문화를 보며 늘 생각했다. 프랑스의 모든 서민들이 전부터 그렇게 밥을 먹었을 리가 없다고.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지금의 프랑스 식탁문화는 ‘귀족 문화’를 이식한 것일 뿐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화가 처음부터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귀족 문화의 핵심이 무엇인가. 형식과 격식을 ‘전통과 예의’로 미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지 않고 어딘지 어색하다. 밥을 먹는다기보다 ‘교양인의 룰’에 맞는 몸짓과 표정이 더 중요한 공간. 평민인 내가 프랑스 레스토랑이 여전히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서민의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움막집에서 장작불 위에 냄비를 걸어 놓고 조악한 재료들을 넣고 끓여 먹던 중세 유럽의 농민들. 귀리와 푸성귀들로 허기를 채우기 바빴던 중세인들에게 주방이라는 공간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랬기에 귀족이나 부르주아 저택에만 제대로 갖춰진 부엌이 있었을 뿐 농민이나 도시 노동자들은 부엌이라는 공간 자체가 없었다. 굴뚝과 벽난로는 12세기에 도입되었기에 당연히 화덕도 없었다. 기껏해야 고기를 불에 구워 먹거나 스튜를 만들어 먹는 것이 다였다. 이것은 18세기 산업혁명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말은,
그때까지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제대로 된 ‘가정식 요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4세기까지는 빵도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밀과 보리를 섞은 납작한 빵을 만들어 먹었으나, 효모를 넣어 부풀린 빵을 유럽인들이 광범위하게 먹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백 년 전의 일이다. 제분소와 화덕은 영주나 교회 소유로 비용이 들었기에 중세인들에게 빵은 오래도록 성직자나 귀족들만 먹는 사치품이었다. 빵이 서민들 주식으로 정착한 것은 15세기 이후 마을마다 공용 화덕과 방앗간이 생기고 16세기 이후 농업 혁명으로 곡물 생산량이 늘면서부터다
이토록 열악한 중세인들이 어떻게 ‘르네상스’라는 혁명적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은 분명 자본의 착취와 관련이 있다.
실제 르네상스가 태동된 시기는 신대륙 발견과 유럽 열강들의 식민 제국이 시작된 때와 일치하며, 프랑스 르네상스가 꽃핀 17세기는 프랑스가 식민지들로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한 후였다. 그러나 민중들의 삶이 풍족한 삶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약탈로 갖게 된 풍요는 철저히 왕실과 귀족들의 욕망 확대에 기여했다. 그들의 제국주의 탐욕이 커지는 만큼에 비례해 발전한 대표적 산물이, 현재의 ‘프랑스 음식 문화’이다.
이 시기 프랑스는 ‘음식 문화 전파’에 적극적인 투자를 한다. 15세기에 발명된 인쇄술 이후 50년간 유럽은 2천만 권의 책을 생산하여 지식 전파가 급속히 이뤄졌는데, 이때 프랑스를 대표하는 요리책과 식탁매너에 관한 지침서들이 꾸준히 발간된다. 14세기까지 그 어떤 식문화도 조리학도 조리법도 조리기구조차 없이 전쟁만 일삼던 ‘야만의 프랑스’에게 가히 ‘문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플라티나가 1465년에 쓴 <올바른 쾌락과 건강에 대하여>라는 실용서는 ‘식도락’으로 육체적 정서적 쾌락을 얻을 수 있다 말함으로써 ‘풍요로운 식탁’의 확대에 일조하였다. 귀족들은 밤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고 ‘누가 최고의 접대를 하는가’를 두고 경쟁할 만큼 식탁 풍경은 곧 권력이었다. 귀족들에게 식사는 궁정과의 결탁을 왕에게는 부와 권력을 과시할 수 있는 훌륭한 사교의 장이었다. 이렇듯 ‘미식의 연구와 발전’은 상류층의 권력 과시욕으로 탄생했다.
루이 13세부터 16세까지 프랑스 음식문화는 ‘상류층의 고유문화’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16세기와 17세기 식민지들로부터 전래된 다양한 식품과 조리법은 더욱 그들을 만족시켰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 전통 요리라 불리는 ‘오트 뀌진(haute cusine)’이 탄생하게 된다. 1651년 라 바렌느에 의해 마련된 현재 ‘프랑스 음식의 기틀’은 말 그대로 high cooking, 상류층을 위한 고급 요리이지 처음부터 서민 음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듯 프랑스 요리의 기초가 형성된 것은 17세기의 일이며, 다양한 소스들과 식전 음식들, 모둠 치즈가 차례로 나오는 서빙법이 도입된 시기 등도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러 유명 요리사들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특히 1800년에 처음 등장한 가스트로노미(미식법)라는 용어는, 식민지라는 거대시장으로 생겨난 신흥 부르주아들과 기성 기득권인 귀족과의 융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탄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요리 이미지들인 현대적 감각의 플레이팅과 균형 잡힌 식단은 ‘누벨 뀌진’이라 하여 1970년대에야 등장한 것이다. 귀족들은 오래도록 채소를 먹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프랑스 요리는 ‘유구한 전통’으로 둔갑되어 ‘세계 최고’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을까. 프랑스가 자국의 이름을 앞세운 마케팅을 시작한 시기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그들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열등한 인종을 만들어내고 ‘인종차별’ 혐오를 탄생시킨 것과 같다.
서양 요리 용어의 대부분이 프랑스어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말은 프랑스 요리가 서양 요리의 기원이라서가 아니라, 서양 요리가 정립될 당시 프랑스가 ‘최고의 권력’을 가졌었다는 뜻이다.
프랑스 요리가 지금 같은 타이틀을 갖게 된 배경은, 철저한 ‘제국주의 마케팅’으로 인한 ‘선전의 결과’이지 결코 역사와 전통의 힘이 아니다. 개연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화조차 끌어낼 수 없는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럽 중심주의' 서양 중심 세계사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렇기에 ‘미식의 나라 프랑스’라는 말은 참으로 이상한 수식어이다. 아무리 프랑스혁명 이후 귀족 식문화가 대중화되었다 해도, 여전히 프랑스 서민들이 먹는 음식은 그와 매우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은, 문화의 형성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설혹 그 사회 전체의 서사를 담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겨우 400년도 안된 역사를 가진 요리는 세계 최고 전통 음식이 될 수도 없고, 특권 계층의 음식은 한 나라의 식문화를 대표할 수도 없다. 우리는 신선로를 ‘궁중 요리’라 부르지 한국 대표 음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김치, 된장, 불고기라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전통 음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 후속글로 이어집니다. ‘현대 프랑스 음식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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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중세 음식 위키백과 영문 http://bitly.kr/dv45pllh37v2, < 중세 시대 > Mikael Eskelner http://bitly.kr/zlp3NNTLtJu, < 중세 시대 음식 > Adamson, Melitta Weiss http://bitly.kr/00fZTYViJih, 중세 음식과 음료 영문 자료 http://bitly.kr/QMN96C2mBis, < 근대 유럽의 형성 16-8세기> 이영림, 주경철, 최갑수 http://bitly.kr/DI4dxFrhuxH, < 르네상스 시대의 어둠 > 도현신 http://bitly.kr/uy40KchG0Qg, 14세기 유럽 부엌 모습 이미지 http://bitly.kr/TrXLHj6lDKZ, 독일 중세 성 부엌 사진 http://bitly.kr/NSI33ZKYWca, 프랑스 식민제국 나무위키 http://bitly.kr/9OQw4afB9Mx, 고구려 음식 문화 http://bitly.kr/J6bdd7XRM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