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Oct 06. 2020

프랑스의 거대 정치 프로젝트,
'문화와 예술의 나라'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 르누아르의 무도회, 드가의 발레리나... 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한 번쯤 들어본 이름들이며 보았던 그림들이다. 프랑스가 배출한 ‘위대한 화가들’. 그들이 미술사에 남긴 인상은 강렬했고 그들의 미적 성취는 세계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 작품이 있는 미술관들은 프랑스 주요 관광 코스가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은 미술학교나 예술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많다. 프랑스는 자타공인 ‘예술의 나라’기 때문이다. 
 
 이처럼 뛰어나다는 프랑스 예술품들을 접하며 우리 안에는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싹튼다. 그들의 것을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프랑스가 문화와 예술의 나라가 된 역사는 사실 그리 길지 않다. 불과 400년 전까지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무지와 전염병과 전쟁이 뒤엉킨 암흑시대를 살고 있었고, 그러한 ‘야만적 프랑스’에 문명의 서막을 비춘 것은 르네상스가 발원한 이탈리아였다.
 
 
당시 유럽 최고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는 18세기까지 포크도 접시도 없이 손으로 식사하던 프랑스인들에게 포크를 가져다주고, 프랑스가 르네상스를 꽃필 수 있게 한 최고의 공헌자였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프랑스의 여러 번에 걸친 이탈리아 침공이 있었다. 15세기 말부터 60년 넘게 지속된 정복 전쟁은 이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이때 프랑스군에 의해 자행된 집단 강간으로 이탈리아에는 매독이 광범위하게 퍼지기까지 한다. 제아무리 최강대국이었대도 반세기 넘게 계속된 유린을 버틸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한 16세기 '파비아 전투' 모습
이탈리아 최고 가문 '캐서린 드 메디치'와 프랑스왕 앙리2세 결혼식. 이탈리아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왕 요청에 의해 프랑스에서 노년을 보내며 완성한 '모나지라'


 그 틈을 타 프랑스는 앞선 이탈리아 예술을 적극 모방하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학습하였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같은 이탈리아 명장들을 고용하고 그들의 예술품을 수집하였으며 이탈리아의 사조는 대거 프랑스로 유입된다. 전쟁의 끝에 이탈리아는 최고 가문의 딸을 프랑스 왕에게 시집보내며 선진 이탈리아의 모든 문명이 프랑스로 넘어가게 된다. 유럽 패권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갔고 프랑스는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이처럼 
 
 프랑스의 독자적 문화와 예술의 형성’은 이탈리아 정복이라는 ‘무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 방식은 그 후로 이어진 ‘제국주의 정책’으로 그대로 이어져갔다.
 

 1635년 루이 13세의 재상이던 리슐리외 추기경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설립을 시작으로 루이 14세 때에는 무용원, 음악원, 희극원, 회화 조각원 같은 무수한 아카데미들이 생겨난다. 국가의 선택과 감독하에 예술가들을 훈련 지원하고 ‘프랑스의 예술적 권위’를 세움으로써 귀족을 통제하고 프랑스적 환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루이 14세의 재상 콜베르는 1661년 국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직접 운영하였고 1671년 미술 아카데미 보자르를 설립하며 양질의 미술품 생산을 국가적으로 관리했다. 예술가와 작가들을 조직하고 모든 화가들이 아카데미에 소속되게 하였다. 그의 지휘 하에 ‘파리 살롱전(Salon de Paris)’을 시작으로 정기적으로 살롱전을 개최하고 수상으로 보상함으로써 미술가들에게 부와 권력과 명예를 수여했다. 


콜베르가 루이14세에게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을 소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근엄하고 권위주의적인 실내 분위기. 루이14세 재상이자 프랑스 중상주의의 아버지 콜베르


 그러나 국가의 통제 하에 생산된 작품들은 철저히 ‘프랑스적 시각’을 담은 것들일 수밖에 없었다. 혁명 후에도 한동안 살롱전 수상자는 다비드의 제자들이 휩쓸었을 만큼 ‘프랑스의 위대함’을 잘 구현한 ‘역사화’를 그린 화가들만이 궁정 화가 지위를 얻었고 미래가 보장되었다. 살롱전의 목적은 ‘왕과 귀족들의 미적 취향’을 ‘대중에 전파’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프랑스적 기준을 세계에 전파’하는 프랑스의 궁극적 목표와 닿아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살롱전 1등 수상자는 로마로 유학을 보내는 등 ‘프랑스적 정신’이라 불린 예술은 사실 이탈리아와 로마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며, 그리스 로마 문화와 예술에 영감을 받은 예술들이 실제 프랑스 르네상스의 주축을 이루었었다. 루이 14세의 바로크 건축 양식과 나폴레옹이 파리에 건설한 로마 양식의 건축물들이 그러하다. 
 
 물론 이 시기에 프랑스 미술의 독자성이 수립되기도 했다. 몽테뉴의 자아 탐구와 합리주의 철학의 대두로 루이 14세의 궁정 수석화가가 주축이 되어 작가들을 교육하고 ‘프랑스 예술의 보편 법칙과 표준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이 표준은 후에 18세기 계몽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1816년 왕립 아카데미는 ‘아카데미 데 보자르’로 명칭을 바꾸고 다양한 예술가들을 양성해오고 있다. 프랑스 예술의 중심 아카데미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1932년 파리 미술 살롱전 풍경.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뒤섞인 호화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폴레옹 1세 대관식을 그린 '궁정 화가' 다비드 그림. 들라크루아가 그린 7월 혁명 그림. 둘다 대표적인 프로파간다 그림이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프랑스의 ‘유명 예술가들’은 대부분 아카데미 출신들이었다. 푸생, 다비드, 앵그르, 들라클루아 등의 화가들 그리고 생텍쥐페리가 1939년 ‘인간의 대지’로 소설 대상을 차지한 곳도 아카데미 프랑세즈 콩쿨이었다. 일반 예술 학교가 아닌 불멸의 지성들만 회원이 될 수 있다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40명 정원으로 구성되는데, 몽테스키외, 볼테르, 빅토르위고, 코르네유, 베르그송 등의 철학자와 작가들이 회원이었던 만큼 그들 자체가 프랑스를 상징하는 최고의 예술적 권위였다. 
 

 그러나 국가 직속 기관이기에 프로파간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실제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들은 국가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헌신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대다수의 낭만주의 작가들인 ‘왕당파’와 시민 혁명을 지지하던 ‘공화주의자’가 있다. 그들은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적 기준의 수호와 확장’이라는 목표다. 계몽주의의 일관된 철학이다. 

 프랑스 대표 작가 ‘
빅토르 위고’는 181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콩쿨 입상 후 낭만파 지도자를 거쳐 184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된 귀족 출신의 왕당파 작가였다. 후에 공화주의로 전향하여 <레미제라블> 같은 사회 빈곤 문제를 다루지만 그의 주제의식은 ‘무지한 대중의 계몽’과 ‘이상적 사회 건설’이라는 계몽주의 사상에 맞춰져 있었지,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주장한 건 아니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핵심 축이었던 빅토르 위고(좌)와 또 다른 프랑스 대문호 발자크(우)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빅토르 위고 작품 <레미제라블>. 그의 작품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섰으나, 작가 자신은 가난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풍요로운 부르주아였다


 그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기, 1848년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이력이 있으며 그로 인해 마르크스 사위 ‘폴 라파르그’에게서 '기회주의적 공화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중요한 건 그가 왕당파와 공화파 양쪽 모두의 사상의 토대였던 ‘계몽주의를 이끈 핵심 축’으로 삶의 대부분을 특권층으로 존재하며 사회적 주류에 속해 있던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문호 ‘발자크’는 나폴레옹 숭배자로 부르주아의 활력과 산업의 발달을 찬양하였고 시인 ‘보들레르’ 역시 패션 현상을 찬양하며 프랑스 중상주의 콜베르티즘에 힘을 실어 주었다.  


 궁정 놀이터에서 시작된 호화로운 귀족 문화와 식민지로 축적한 부가 ‘위대한 예술가들’과 만나, 예술의 나라 프랑스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처럼 절대군주로부터 출발한 ‘프랑스 문화예술 정책’은 프랑스에게

 "군사, 외교,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무기"였다.
 






* 마지막 문장 인용 출처 : < Snowman > the Gilded Stage, p.51∼52


프랑스인의 '자문화중심주의' 


참고 자료 : 빅토르 위고 낯설게 보기 http://asq.kr/3yx4BHOdkAN4, 빅토르 위고가 노동자 탄압에 적극 가담했던 역사 영문 자료 http://asq.kr/QR71RGo4rsls루이 14세 문화예술 정책, 정치 헤게모니 잡기 위한 콜베르 전략 http://asq.kr/rGLBj77Zotra, 프랑스 미술 발달은 콜베르티즘 결과 http://asq.kr/xKD5BwwDrt45, <프랑스 문화와 명품 산업> 한양대 박동준 교수 논문 http://asq.kr/5fnUzuNmtiJO루이 14세 국가주도 문화사업 http://asq.kr/4S4OVl1wI7dgD, 중세 전쟁 성범죄와 매독 연관성 기사 http://bitly.kr/WzDUfya9MBE이탈리아 전쟁 위키백과 http://bitly.kr/1VqYgLyKpJ9이탈리아 요리가 프랑스 요리에 미친 영향. 뉴욕타임즈 기사 http://bitly.kr/FnBTRhO1f5O아카데미 프랑세즈 위키백과 http://asq.kr/SfTzSjS0WLPG



이전 18화 위대한 프랑스 예술? 카뮈와 고갱의 불편한 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