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열쇠 '자기 표현'
"싫어! 안 할 거야!"
사춘기 초입에 와있는 아이가 오늘도 입을 쭉 내밀고 말한다. 너무나 당당하게.
그런 딸을 보며 늘 생각했다. '그래 너는, 고분고분하지 말고, 순종하지 말고, 계속 그렇게 까칠하게, 네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하며 살아'
나는 오래도록 '나'를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왔었다. 아니, '나'를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채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이 억압되었을 때 어떻게 삶을 갉아먹게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어린 시절의 나는, 자기주장은커녕 당연한 요구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아니, 해 본 적이 없었다. 남들 다 하는 그것, 모든 아이들이 하는 그것, 엄마에게 떼를 부리고, 아빠에게 어떤 것을 사달라며 조르고 하는 것을 나는 해 본 적이 없었다. 해서 내 아이의 저토록 선명한 자기표현을 보며,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을 많이 떠올리곤 했다.
"엄마 나 기분이 안 좋아. 엄마 나 어디가 아파. 엄마 나 뭐가 먹고 싶어. 엄마 난 그게 좋아"
"아빠 나 그거 갖고 싶어. 아빠 나 무서워. 아빠 나 예뻐? 아빠 내 옆에 있어. 아빠 나 안아줘"
저런 말들을, 누구나 하는 저 평범한 말들을 해본 적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훗날 어떻게 내 생을 잠식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 심지어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 동안,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는 것조차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닌 상대가 먹고 싶은 것을 같이 먹었고, 언제나 모든 것을 상대가 편한 대로 맞춰주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괴로워하였다.
왜 나는 바보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할까.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 오래된 습관은 금방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먹고 나온대도 한번 굳어진 관성은 늘 나를 미련한 '습'으로 끌어당겼고, 그때마다 또다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것에 나를 맞추며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오랜 시간... 내가 나를 말하지 않고 살아온 동안, 나의 억눌린 감정은 썩고 문드러져 나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억압된 자기표현이 커다란 분노로 내 안에, 나를 죽이는 독으로 퍼져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늘 여기저기가 아팠다는 것을.
이제 그만, 그것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이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막 서른을 넘겼던 어느 날, 그런 나 자신을 놓았다.
나의 삶이 이토록 피로한 이유가, 내가 늘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늘 모두 앞에서 '좋은 사람'이고 싶고 '착한 아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그 마음.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언제 외면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그래야만 나는, 가치로울 수 있다는 모래성 같은 그 두려움. 그 뿌리 깊은 불안감이 나를 그렇게 몰아갔었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나 자신 그대로가 아닌 '남들이 원하는 나'로 존재했었다.
그 시간들이 매우 아팠었다는 것을, 그때 나를 놓으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완전하게 돌변했다. 모두에게 쏠려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오직 내가 편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았다.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남들이 뭐라건 나에겐 지금 당장의 내 감정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어떻게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렇게 너만 생각할 수 있느냐, 이기적이다' 그런 말들을 들어야 했다. 가족들에게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지금의 남편도 그때 만났다. 내가 막 맹랑하게 굴기 시작했을 때.
실제로 남편에게 자주 들은 말이 '이기적이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냥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그냥 내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했을 뿐인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였을 뿐인데, 철저한 사회인인 남편은 그런 나의 '자연인의 솔직함'이 생경한 것을 넘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성인의 룰이 강하게 지배하는 이 땅에서는, 마음에 없어도 예의 있게 칭찬의 말도 해주고, 마음에 없어도 깍듯하게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지 않아도 웃으며 행복하다 말해야 하거늘, 나는 남들처럼 그렇지 않고 마음에 없으면 안하기 때문이었다. 아이처럼, 싫으면 싫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경우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시댁이 하자는 것은 말없이 다 따라주었다. 그저 어머님에게 시댁 가족들에게 나의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 애쓰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들의 성 안에 기쁘게 들어와 주면 좋겠는데 절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내가, 발을 빼고 있는 아내가 야속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남편의 그 말은 '이 사회의 절대 가치인 이성적 기준에 맞추지 않는 나'를 일방적으로 판단한 말에 불과함 또한 안다. 나는 본래 성정 자체가 나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게 더 행복한 사람이니까.
남편에게 말했었다. 나는 당신처럼 모두 앞에서 웃고 싶지 않다고. 나는 진작에 그걸 그만 뒀다고. 내가 불편하고 마음이 안 좋은데 왜 남들 앞에서 웃고 있어야 하냐고. 그것은 나를 속이는 거라고. 당신도 그만 두면 좋겠다고. 그것이 얼마나 스스로를 해방시키는지 당신도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알고 있다. 남편은 바뀔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안타깝다. 그것이야말로 고도로 사회화된 문명인들의 가장 짙은 그림자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만이 옳은 삶의 형태'라는 관성적 사고를 포기하지 못하는 한, 현대인들은 절대로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없다. 어쩌면 끝내 모를 가능성이 많다. 스스로가 이성의 감옥 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날 모든 문명인들이 외롭고 불행한 이유라는 것을. 우리가 불행한 건,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말하고 표현하는 거라는 것을. 그것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외롭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나를, 나 자신을, 나의 슬픔을, 나의 기쁨을, 나의 아픔을, 나의 행복을.
오래도록 하지 못했던 그것을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 모든 그림 : Pablo Picasso
외로움에 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