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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Jul 08. 2019

'언어'를 잃어버리다.
'나'를 잃어버리다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10화


 언어. 는 한 개인에게 내재된 정신의 집약이며 고유한 빛이 드나드는 통로이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그 언어에 내포된 공동체의 정신적 유산을 함께 습득하고, 개개인의 사고와 창조성을 표현하며, 타인과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외부'와 '나'를 연결한다.
 
한국에 살며 한국말만 하며 살 때에는 몰랐다. 언어라는 것이 이토록 우리 정신의 뿌리에 깊이 닿아있는 것인 줄을. 그렇기에 그것을 잃었을 때, 개인의 정체성이 '부정될 수 있고' 가치가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프랑스에 온 후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정성으로 돌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향에서 말동무 하나 없이 출발한 독박육아는 생각지 못한 어려움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했고, 출산 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몸은 몸대로 망가져 늘 만성피로를 달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언어 습득' 내지는 '문화 습득' '사회의 이해'는 언제나 뒷전이 되어버렸었다. 그렇게 
 
 이 땅에 적응하기 위한 '기본기'를 제대로 다질만한 체력도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로 나의 시간들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에 대한 '역풍'이 나를 덮치는 것은 실로 순식간이었다.
 
 내가 '막 말을 뗀 어린아이 같은 단어'와 '알아듣지 못하겠는 발음으로' 입을 뗄 때마다, 불친절했던 어학원 선생의 아이 바라보듯 하던 눈빛 정도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갔을 때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차가운 주인의 눈빛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했던 순간들은 언제나 '많은 이들과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시댁 가족들과의 식사자리. 그리고 남편 친구들과의 식사자리.
 
프랑스인의 식사시간이 기본적으로 '매우 길다'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길지 않았다면 그들 안에서 '좌불안석 끼어있는' 느낌이 그토록 오래 나를 짓누르지는 않았을 테니.  
 
 

모두와 함께 있으나 언제나 혼자인 시간들 


 그것이 어쩌다 주말 잠깐이나 단 며칠로 끝나는 것이라면 좀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시댁 가족들은 여름방학과 크리스마스 방학에는 꼬박 일주일간을 다 함께 보냈었고, 그 외의 방학 때에도 되도록이면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특별할만큼 서로를 아끼는 분들이었다.


가족들은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든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함께함으로서' 더욱 행복해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계절마다 모여 다함께 일주일씩을 보내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자주' 불편을 느껴야했다. 그것은 내게 '융화할 수 없는 시간들'을 더 오래 맞닥뜨려야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 한 명의 '이방인 가족'이 어떤 느낌 속에 함께하고 있는 지를 헤아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나의 상황이 되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럼에도 내게서 '그 불편함들'을 걷어낼 순 없었다.


 더구나 프랑스인들의 대화는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촘촘하게 이어지며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인들 말은 매우 빠르다. 그렇기에 그것들을 알아들으려는 노력은 언제나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 '과부하가 걸린'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나의 언어 능력으로는 그 '급류 같은' 대화의 흐름에 끼어들어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가족들은 친구들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의 즐거운 식사 시간이 내게는 '정지된 시간들'이자 때론 '고문같은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저 마땅히 '한쪽에 찌그러진 채' 그 어떤 소속감도 없는 '완벽한 몰이해'로 그 자리에 '끼어있는 나'의 상황을.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하루 이틀 사흘.... 내 마음은 매 순간 그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안의 감정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용히 홀로 건너야하는 외로움이 있다 


그것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들과의 대화에 참여하기는커녕 알아들을 수 조차 없다는 생경한 좌절감이었고, 내 미약한 문장들은 그들 대화의 어떤 흐름도 따라갈 수 없는 미미한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낯선 상실감이었으며, 그들 사이의 나는 그저 기름처럼 떠있는 어색한 무엇일 뿐이라는 선명한 소외감이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다 좋은 분들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점점 더 많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 시간들은 '끝이 없는 어떤 시공'에 갇혀있는 '극단적인 고립'을 느끼게 했다. 일어날 수도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없는 자리. 

그 순간, 외부와의 소통이 끊긴 그 순간들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껍데기'는 그저 어떤 생경한 공기 속에 놓여있을 뿐이었고 '나의 의식'은 내 안의 어떤 깊은 곳으로 끝없이 침잠할 뿐이었다. 그 안에서 '나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었다. 점점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무의식은 '외부를 향한 모든 감각'을 내게서 차단해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알아듣지 못해도 우아한 미소를 띠며 '나는 괜찮습니다. 충분히 얘기 나누세요'라는 교양인의 신호를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것이 전부였을 뿐.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림은 지금껏 내가 알던 좌절감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고난을 알게했고 커다란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언어'를 잃어버림으로써 '나'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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