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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Aug 10. 2019

동양인이 프랑스에서 겪는
'흔한 봉변' 인종차별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 나의 인종차별 경험 1편 


 피부색이 하얀 것과 조금 누런 것과 많이 검은 것. 그깟 피부색이 뭐가 중요하다고.
 
 보통은 그렇게들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가지는 우리 무의식 속의 힘은 생각보다 매우 세다는 걸 알 수 있다. 더구나 이질적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내가 서있는 땅의 말을 못 할 때' 그곳이 프랑스일 때, 그것은 '괘씸죄'가 추가되어 무시받기에 매우 쉬운 입지를 가지게 됨을 의미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오후, 여느 때처럼 유모차를 끌고 나가 빵을 사고 장을 본 후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었다. "쏴......"   유모차를 끌고 있던 내 머리 위로 물벼락이 떨어졌다. 물이 쏟아지면서 내게 들려온 말, "야! 중국년! 시원하지?... 크크크"  어디선가 어린 남자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
잠깐, 이건 뭐지?'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인종차별적 봉변'을 당한 거란 것을. 
 
 아기를 살폈다. 다행히 아기는 젖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몇몇 집들의 발코니가 보였다. 매일 지나다녔지만 그런 오픈형 발코니가 있는 곳 밑으로 지나는 건 줄은 처음 알았다. 
열불이 올라오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일단 한국말로 뱉고 보았다.
"야! 거기 누구야!" 그러나 이미 아이들 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 저녁 남편에게 씩씩대며 고자질을 했다. 남편은 내게 '운이 나빴다'며 '자기가 대신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분은 안 풀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동네 슈퍼에 장을 보기 위해 막 집을 나섰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어떤 말이 들려왔다. "야! 중국년! @#$%&... 킥킥킥" 내가 뒤돌아보려던 순간, 그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밀치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네다섯 명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멍 때리는 동안 아이들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녀석들 뒤통수에다 대고 무슨 욕이라도 한마디 해주면 좋았으련만.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프랑스 욕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수가. 그나마 당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던 말이 '중국년' 하나밖에 없었던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프랑스 욕'을 센 순서대로 몇 개 알려달라고 했다. 남편은 내 얘기를 듣더니 '또 운이 없었네. 미안해. 근데 그런 말은 안 배우는 게 낫지' 라며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휴.


 인종차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세 명이 또 있다. 한 명은 동네 빵집 아줌마, 다른 한 명은 동네 채소가게 아저씨, 나머지 한 명은 동네 백인 할머니. 처음엔 그들이 내게 보내는 '어색하고 기분 나쁜 공기'의 실체가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번 계속 마주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내뿜는 것이 '그거'였다는 것을.
 
 그 빵집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깝고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파는 곳이었다. 체구가 좋은 '백인 아줌마'는 손님들이 빵을 살 때면 언제나 예의 그 '친절한 미소'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나에게만 빼고. 내가 빵집에 들어서면, 아주머니는 앞 손님에게 날리던 미소를 싹 거두며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대했다. 처음엔 '내가 말이 서툴러서 짜증 나나?' 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채소가게 아저씨는 또 어떨까. 동네에 있는 유일한 채소가게인 데다 엄선된 질 좋은 제품만을 파는 가게. 채소와 과일은 웬만하면 시장에서 사 왔지만, 살림을 하다 보면 갑자기 필요한 것도 있고 빼먹고 못 사 온 것도 있다 보니 자주 가게 되었던 집이다. 역시나 주인아저씨는 '백인' 


 

가소롭다고 해야하나, 저들의 '오만'과 '무지'를 

 

 앞 손님들과 허허실실 농담을 하던 아저씨는 내가 문을 들어서는 순간, 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면 언제나 '내가 너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기분 나쁜지'를 숨길 수 없는 마음으로 보여주곤 하였다. "저거 주세요" 할 때마다 굳이 "뭐라고요? 못 알아들었어요" 라며 내 '비네이티브 발음'을 콕 짚어주던 아저씨.
나와 마주칠 때마다 '인상을 쓰곤' 하셨던 동네 백인 할머니는, 내가 '우리 남편의 아내'라는 걸 아신 후부터 나에게 꼬박꼬박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셨다. 그 부분은 가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가장 나를 맘 상하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이 학교의 같은 반 친구 엄마게서 그런 공기를 느꼈을 때였다. 
 
 프랑스 학교는 매일 아침 매일 오후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기 때문에 늘상 부모들을 마주치게 된다. 더구나 아이 학교는 매우 작은 학교였기에 거의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알았고 항상 따뜻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매일 보는 나에게 그 흔한 '봉주르' 한마디를 하기는커녕 내 쪽을 '아예 쳐다도 안 보던' 엄마가 하나 있었다. 시크함 풍기는 세련된 금발을 가진 백인 엄마였다. 바로 앞에서조차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 엄마의 마음이 읽혔다. 이 역시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 엄마와 처음으로 인사를 하게 된 것은 학교에 입학하고 3년이 지나서야, 같은 반 다른 엄마 집에 가서 '마주쳤을 때'였다. 그때도 그 엄마는 내게 사무적인 인사만 했을 뿐 여전히 차가운 공기를 선명하게 풍겼다. '차도녀' 느낌 확 나는 금발 머리 여자를 볼 때마다 지금도 그 엄마가 내게 전해주었던 느낌이 가끔 떠오른다. 여기는 중국이나 인도가 아닌 유럽, 그것도 프랑스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모종의 일들을 겪을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황당함과 불쾌함은 언제나 물음표로 끝나곤 했다. 

'피부가 하얗지 않으면 열등한 종족이라는 너희의 편견은 어디로부터 왔지?' '그래서, 누가 백인 너희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지?' '너희들이 누리는 부가 어디로부터 왔지?' '이 행성의 주인 행세를 하는 너희의 잔인함이 무얼 낳았었지?' 
  
하지만 그 물음표는 언제나 '우리들만의 물음표'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자기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믿는, 백인들의 무의식 깊이 새겨져 있는 그 '오만'이 얼마나 깊고 굳건한지도.  






프랑스는 '정통' 제국주의 국가다


프랑스의 진실을, 직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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