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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따라 Oct 23. 2024

  눈으로 덮는 용서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면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있는 날이 있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세상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으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 것 같아서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내 마음에도 저렇게 하얀 눈이 내려 마음속 미움, 갈등, 분노를 덮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세상처럼 내 마음속 미움을 하얗게 덮어 용서하고 싶지만 경험상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안다.

내 마음속에는 용서하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교과서적으로 용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서 그 과업을 내 인생에서 밀어놓았다. 내게 무례했던 그들을 용서해 봤자 그들은 그 행위를 허용했다고 착각할 거야,라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옹졸한 내 마음이 부끄러울 때면 사람은 변하지 않아,라는 말을 끌어와 내가 용서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용서란 무의미하다고 포장해 왔다.

며칠 전 내가 정말 정말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이 나와 재검을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전에 내게 막말을 했던 사람이고 끊임없이 밀려들곤 하는 그 막말을 마음에서 걷어내느라 힘들었다.

자꾸 재생되는 막말을 차단하려고 마음속 채널을 돌려 보기도 하고 한 땀 한 땀 나사를 돌려 해체해보기도 했지만 불멸의 막말은 한동안 나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아프다고? 왠지 꺼림칙했다. 내가 너무 오래 미워했나? 혹시 저주도 했던가? 밥알을 씹었는데 작은 돌이 그 안에 있었던 것처럼 씹을수록 입안이 까끌거렸다. 약속 없는 아침, 옷장을 열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거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왔다가 시계 한번 보고 다시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왔다가 시계를 다시 본다. 대여섯 번 왔다 갔다 했을까? 가방을 오른손으로 낚아 들고 집을 나섰다.

절에 제일 높은 북극보전에 올라가서는 망설일 틈도 없이 108배를 한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기도하고 나서 절을 내려오는데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걸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자유로워진 마음과 한층 밝아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눈으로 덮인 세상이 눈이 녹으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듯 시간이 지나면 미움이 잠시 새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순간 나는 안다. 한번 새하얗게 덮었던 기억이 되돌아가고픈 경험이 될 거라는 것을...

몇 년 전 내가 숙제하듯 용서를 했다면 이처럼 후련했을까? 뭔가 마음 한편에 얹힌 것 같았을 수 있다. 눈이 오려면 눈이 올 때가 되어야 하듯이 용서도 때가 되어야 하나 보다.

나는 미워할 만큼 미워한 뒤에 내가 선택한 용서여서 순백의 세상같이 말간 마음이었다. 때가 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하는 용서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마음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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