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가을이었다, 날이 좋아서 나갔다가 전시회장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는 것을 보았다. 날이 좋아서였을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그 줄의 끄트머리에 서서 줄을 이어갔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내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무슨 전시회냐고.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라고 한다. 사진에 문외한인 나는 전시회 앞 북적이는 관람객만큼이나 유명한 사진가인가 보다,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 전시회를 대표하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사진을 지나며 의례적인 감탄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이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옆에는 이 사진 속 모델의 상황을 설명하는 글이 있었다. 싱가포르에 수감 중인 사형수. 2여 년 뒤 사형이 확정된 채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하루하루 세며 하루를 맞이하는 사람의 표정. 어제는 600일 뒤에 내가 죽는구나 했다면 오늘은 599일 뒤 죽는구나, 하면서 하루를 열고 내일 눈 뜨면 598일 뒤 죽게 되겠구나, 하면서 잠이 드는 사람의 표정. 애써 담담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표정 뒤에는 두려움이 쌓여 굳어있었다. 두려움에 막혀서 사람의 기운이 흐르지 않는 배수구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그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대체로 잊고 살 수 있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확실성을 애써 불확실성으로 덮고 사는 것일 뿐. 사진 속 이 사람은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언제 죽을지까지 명료하게 아는 확실성으로 한번 더 직면하고 있었다. 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덮는 우리의 일상과 달리 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드러내는 그의 일상은 흩어지는 두려움 가득한 숨결을 밀폐용기에 담아 압축해서 형상화한 듯했다.
평소에 잘못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사형제도를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생각이 깊어졌다. 죽음이라는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꾼 사형제도와 죽음에 대한 공포, 그 공포가 점점 숫자로 다가오는 것을 직면하는 두려움, 그런 구조를 만들어낸 인간의 잔인함, 잔인해도 마땅할 정도의 범죄의 깊이...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이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