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초점을 맞춰 피사체를 잘 담는 과정과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은 닮아있다. 파사체를 잘 담는다는 것은 초점만 맞추는 게 아닌, 그 시점의 빛의 각도, 바람의 방향, 모델의 상태까지 읽고 있어야 하니까.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 또한 이해해야 하니까.
사진 반에서 움직이는 피사체를 저속 스피드로 찍는 패닝샷을 배웠다. 저속 사진 찍을 때, 움직이는 피사체를 흔들리지 않게 잘 담으려면 그 피사체와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카메라를 이동해야 한다. 그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숙제를 하느라 커피숍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시도한 패닝샷은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았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내 카메라를 움직여야 할 뿐만 아니라 자동차가 움직이는 속도에 카메라를 움직이는 속도 또한 맞춰야 한다. 팔을 고정시킬 수도 없어서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백여 번의 실패 뒤,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피사체를 쫓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움직이는 피사체를 흔들리지 않게 담을 수 있었다.
성공한 사진을 보고 있으니 백번 시도한 보람이 있었다. 움직이는 차는 또렷하고 주위 배경은 흔들려 차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뿌듯한 마음에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기존 생각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 앞에서 정자세로 모델 포즈를 하고 있는 사람을 렌즈에 잘 담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자동차를 흔들리지 않고 담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변하니까.
나는 변하는 사람을 변하는 방향으로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담으려고 했기 때문에 제대로 찍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패닝 샷의 자동차가 움직이듯 변하는데(그 속도로는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나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카메라를 고정한 채 그 사람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카메라를 고정하고 움직이는 자동차를 찍었을 때 흔들리게 나오듯 내가 이해하려는 사람 또한 내 마음에 제대로 담을 수 없었던 거였나 보다.
이제야 살면서 만났던,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 생각이 났다. 그들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났는데 난 3초 전, 3분 전, 3년 전의 그들을 담고 있으니까 자연스레 초점이 맞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남편한테 변했다고 푸념할 때 나의 기준은 연애 때였으니 이 얼마나 망측(?) 한 일인가 싶다.
상대방이 변하는 방향을 따라 나도 위치를 옮겨가며 마음에 담는 것, 얼마나 고난도일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결국 사람을 섣부르게 파악했다고 단정 짓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