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좋아하고 꽃을 볼 때마다 각자의 매력을 찾아내곤 하지만 철쭉은 보면서도 내내 지나치기 일쑤였다.
‘도무지 매력이 없어. 너무 흔해. 저 억센 잎은 또 뭐야? 꽃잎 색도 너무 진하고 말이야.’
시들고 나서도 가지에 매달려 있는 철쭉을 보고서는
‘어쩜 저리 시들어서까지 가지에 매달려 있을까? 꼭 변심한 애인에 매달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자존심도 없나?’ 거의 속으로 막말을 하곤 했다 (반성한다). 시들기도 전에 툭 떨구어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기억에 남기는 벚꽃을 찬양하는 나로서는 시든 뒤에도 가지에 매달린 철쭉의 끈질김은 구질구질하게까지 다가오곤 했다.
그러던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철쭉을 다시 보게 됐다. 정확히는 4월 초 벚꽃에 빠져 벚꽃을 찍고 돌아서는데 철쭉 봉우리를 보았던 것 같다. 그때는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벚꽃을 보며 수십 번 셔터를 눌러댄 뒤였는데 그 뒤에 있던 철쭉을 보면서는 단 한 번도 렌즈에 담을 생각을 못했다.
그 뒤 함빡 핀 목련을 담고 돌아설 때도, 며칠 뒤 시든 목련의 처참함을 보다가 돌아설 때도 철쭉은 내 등 뒤에서 피어있었다. 그때는 제법 꽃을 피운 모습이었지만 카메라 안에 담지는 않았다. 가지에 꽃만 덩그러니 달려 있어 가냘파 보이는 진달래와 달리 나뭇잎을 사방에 두르고 핀 철쭉은 내가 눈길을 안 주어도 혼자 잘 이겨낼 것 같았다.
4월 내내 틈틈이 꽃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 곳곳에서 피어난 철쭉은 다른 꽃들이 피고 지는 시간을 버티며 한 번도 내 카메라 안에 담기지 못했다. 내가 다른 꽃을 찍을 때 내 뒤에서 자신의 색을 변화시키며 묵묵히 봄을 지키고 있었다. 피어서, 피었다가 져서, 완전히 시들어서, 가지에 매달려, 변해가는 색으로 마당을,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6월 2일이었다. 아파트 마당에 나뭇잎을 찍으러 나갔다가 철쭉이 가지에 붙어 있는 걸 마지막으로 본 것은. 꽃잎 가장자리가 검게 타서 쭈그러진 채 매달려 있는 철쭉을 보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결국 카메라를 켜고 렌즈 안에 철쭉을 담았다. 시들어 메마르고 주름진 꽃잎, 가장자리부터 색이 변한 꽃잎을 가지에 매달고 있는 철쭉을 보고 또 봤다. 마치 힘든 역경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는 듯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지쳐도 견디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지며 시들어도 버티는 모습이 마음을 적셨다.
생각해 보면 결국 4월 5월 6월 석 달 내내 봄을 지킨 건 철쭉이었다. 4월 초 열흘 남짓 흐드러지게 피어 사람 마음 설레게 하고 아름다웠던 모습만 남긴 채, 시들기도 전에 툭 떨구는 벚꽃과 달리 철쭉은 시들어 비틀어진 모습을 드러내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벚꽃이 화려한 모습만 보여주다 떠나버리는 스타 연예인 같다면 철쭉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을 견디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화려한 모습으로 한눈에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보통의 존재로 이 경쟁 세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하면서 말이다.
산다는 게 버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얼마나 버티느냐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라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다 보면 활짝 피는 시절도 찰나에 왔다 가는 게 삶이 아닌가 싶다. 결국 우리의 일상은 벚꽃이 아닌 철쭉의 삶과 겹쳐진다. 열흘 남짓 세상을 환상으로 물들었다가 사라지고 마는 벚꽃이 우리의 일상 모습인 것도 아니고 사연을 품고 즈려 밟히기만을 기다리는 진달래가 우리의 일상 모습인 것도 아니다. 철쭉같이 주목받지 못하는 일상을 굳건하게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지 않을까.
왜 보면 꼭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단정 지었을까. 잠시 환상에 젖게 하다가 내 설렘 책임도 안 지고 떠나는 벚꽃에 뭐 그리 푹 빠져있었을까. 내가 다른 꽃을 찍을 때도 꿋꿋하게 내 뒤에서 석 달여를 버텨온 철쭉의 의리는 왜 폄훼했었는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으면서 얻은 수확 중 하나다. 보통의 존재, 철쭉이 지니는 버팀의 미학을 발견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