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평론가는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찾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은 거라고 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기억하는 과정으로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싶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그동안 내가 스쳐 지나갔던 사물과 생명체를 제대로 관찰하게 됐다. 관찰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눈으로 조심스레 만졌다고 해야 할까. 황현산 평론가 글처럼 사물의 깊은 내면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카메라 렌즈를 겨누어 보고 보고 또 봤다. 볼수록 더 섬세한 부분을 보여주는 사물과 생명체는 친구와의 교감 같았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눈을 맞추며 잠시의 침묵만 견디고 나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친구와의 시간, 상대방이 판단 없이 들어줄 거란 믿음만 있으면 나의 내면을 무장해제하고 마음을 열어보았던 순간들, 친구들과 그런 시간이 모여서 나의 청춘을 견디게 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할 말이 가득 차 터질 것 같아도 속에서 꺼내는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친구의 눈망울이 변해서도 아니고 할 말이 없어져서도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꺼내 놓았던 말은 우리 사이의 찻잔의 온도만큼이나 서늘하게 식어 변한다는 것을.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꺼냈던 말들이 다른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가위로 잘려 다른 모양새가 되어 한참 뒤 돌아왔을 때의 그 생경함을 마주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차 한 잔이 아니라 칵테일 한잔으로도 마음의 빗장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내 마음이 수시로 답답하고 종종 갑갑했던 것은 아마도 속 이야기를 꺼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일 테다. 다행스럽게도 사진을 배우면서부터는 갑갑할 때마다 산책을 나가서 사진을 찍으며 풀 수 있었다. 눈앞에 스쳐 지나가던 세상을 카메라 렌즈 안에 담는 것은 낯설고 설레는 일이다. 여러 사물과 생명체 중 주피사체로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늘 축 늘어져 있었던 몸이 가볍게 솟아오르는 듯했다. 마음에 와닿는 피사체를 만나서 조심스레 다가가 렌즈 안에 담을 때, 그들은 새삼스레 포즈를 취하며 뽐내기 시작한다. 구석에 피어있는 들꽃은 평소에 안 보여주건 솜털을 드러내기도 하고 민무늬로 생각했던 절 기와 문양이 부각되기도 한다. 전에 보던 소나무는 그저 한그루의 덩어리였는데 렌즈 안에 담고 보니 까칠한 잎이 한 올 한올이 살아나 찌르듯이 뾰족해 보이기도 한다.
피사체를 렌즈에 담고 초점을 맞추며 바라보는 순간은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거침 그 매끄러움 그 잔 솜털이 피부에 와닿는 듯하다. 볼수록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어 눈동자에 힘이 들어갈 즈음 나와 피사체의 교감 순간을 알아채기라도 했듯이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준다. 마치 드디어 너희 둘이 여기 이 자리에서 서로 마주하는구나, 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환영하는 듯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흥분으로 떨리곤 한다. 스쳐 지나가던 피사체와 나는 이제 이 사진하나로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다. 무색 무향 무매력이었던 들꽃 한송이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렌즈 안에 담은 이후로는 그저 들꽃이 아니라 24년 길디 긴 장마의 끝 무렵에 함께 했던 들꽃으로 의미가 부여되곤 한다.
너와 나 사이에 추억이 생기면 우리는 의미 있는 관계로 맺어진다. 앞으로 다른 피사체와의 연결을 통해 관계의 끈은 점점 더 이어질 것이다.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면서 점점 친구가 불어나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