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위해서 애쓸 것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게 더 좋다는 말이 널리 퍼져있지만 난 이 말을 한번 점검해보고 싶다. 결혼 전 이성과의 만남이 모두 상대방이 다가온 경우인 나로서는 수동적인 사랑을 이어가는 생활에 다소 회의적이다.
전에 수동적인 사랑을 일컬어' 냄비론'이라고 내 나름의 이론을 펼친 적이 있다. 인덕션 위에 올려놔서 뜨거워진 냄비처럼, 나를 향한 상대방의 사랑을 전해 받아 싹튼 사랑을 냄비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냄비 사랑이 언제 식을지는 인덕션불이 언제 꺼지냐에 따라 좌우된다. 이처럼 의존적인 감정일 뿐이라는 것이 이(내 맘대로) 이론의 핵심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랑에 물들어 같이 설레고 들뜰 수 있지만 사랑을 받는 기쁨으로만 충족된 상태로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불안정적일 수 있다. 물론 인덕션 불이 지속적으로 켜있어서 평생 그 위에서 따뜻한 냄비로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전에 불이 나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보다는 인덕션이 꺼진 뒤 싸늘하게 식어가는 냄비바닥을 느끼며 자신조차도 비참하게 식어갈 수 있다.
인덕션이 식어가는 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 그나마 덜 비극적일 텐데 대부분의 경우 상태 보존의 법칙이 있어서 그 열기를 유지하려고 애쓰게 된다. 내가 열기를 생산해 상대방을 데워본 적 없기 때문에 관계가 식어갈 때 그 관계 유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인덕션을 종용하는 것뿐일 테다. 자신이 자체 발화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꺼진 인덕션만 탓하며 두드리다 보면 인덕션은 아예 고장 나 버리기 쉽다.
평생 인덕션의 따뜻함에만 의지하려던 수동적 태도의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하다. 내가 사랑을 받는 쪽으로 형성된 관계에서 나는 인생을 수동적으로 끌려가게 된다. 사랑을 받기만 하던 입장에서는 그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상대방에게 주어진다.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니까 편하고 안전할 거라고 착각했는데 웬걸, 늘 상대방에게 바라고 따지게 된다. 받던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의 사랑이 전보다 줄어든 것 아닌가. 어디론가 빠져나간 것 아닌가 하면서 재게 된다. 삶의 주도권이 나 자신에게 없다.
무엇보다 결혼생활은 관계에 대한 능동성 없이 수동적으로 시작해서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혼생활에 필요한 인내의 연료가 고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오려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자신의 감정을 능동적으로 수행한 사람은 사랑이 위기에 닥쳐도 다시 그 위기를 극복할 의지와 경험이 있다. 그 과정에서 고통과 번민이 따르더라도 그 또한 온전히 자신이 성숙해지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랑을 받을 때보다 사랑을 할 때, 더 성숙해지는 법이다. 아이를 낳아 키워본 엄마는 모성애를 통해 배운다. 대가 없이 주는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성숙하게 성장시키는지 안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 자식 앞에선 자식을 더 사랑하는 부모가 늘 약자지, 이 말이 증명하듯 부모 자식 간은 늘 쏠림관계이다. 평등하지 않다. 이런 불평등 관계가 손해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 안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자식을 향한 사랑이 샘솟을 수 있다는 건데 이 관계야말로 내 땅에 석유가 터져 내가 산유지가 되는 것만큼 유익하고 유의미한 관계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마음속에 자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가.
물론 남녀 간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은 다르지만 사랑을 하는 것의 가치는 충분히 모성애를 통해서 깨우칠 수 있다. 상대가 어떻게 변한다 해도 이 사랑을 내가 지키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 사랑을 직접 개척해서 결혼이란 제도 안으로 들어가길 바란다.
이 주장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상대방의 사랑을 받는 수동적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수동적으로 받는 사랑에만 그치지 않고 상대방을 다시 능동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엔 수동적 사랑에만 머무는 경우와는 다르다.
또한 자체 발화된 사랑이라 해도 사랑이 식는 건 마찬가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사랑이 식어가는 것에 대해 상대방에게 원망하고 한탄하는 처지는 면할 수 있다. 내 마음이 식어가는 온도를 내가 느끼며 받아들이는 것은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적어도 타인의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삶을 주체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으니까 후회가 덜하다.
능동성의 가치는 나이 들수록 더 빛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리에서 뒤돌아보면, 가장 후회되는 인생의 지점은 어떤 결정을 할 때 나의 의지보다 타인의 입김과 시선에 휘둘렸을 때이다. 내 순수의지와 내 감정으로 내린 결정으로 잠시 자갈밭을 걷는다고 해도 그것은 내 인생의 실패가 아닌 경험으로 쌓여 밑거름이 된다. 반면 타인의 강요에 의해 떠밀려간 자리에서는 꽃을 피워도 그 꽃은 보람이라기보다는 그저 결실이 된다.
사랑의 능동적 주체자가 되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기 두려워 멈칫하게 된다. 용기는 굳게 결심한다고 절로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믿음에서 싹튼다.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꿀 의지가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어온 경험이 쌓일 때 용기가 생긴다.
또한 자기 보호라는 이름하에 자신을 가두는 그릇된 집착을 떨칠 수 있는 현명함도 필요하다. 사랑을 주고 나서 되돌려 받지 못할 때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준 사랑을 돌려받지 못해도 사랑을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진정한 용기는 나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거리끼지 않을 때, 나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허용할 때 샘솟는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사랑을 주도적으로 펼칠 수 있는 능동성이 주어진다.
사랑할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자아가 강해져서 자신과 타인사이에 놓인 벽이 높아져서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벽을 낮추고 사랑을 하며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가능하면 수동적인 사랑에 머물지 말고 좀 더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휴대전화 안에 sns로 연결된 가상 세계 말고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따뜻한 체온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에너지 가득 한 세계를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