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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Sep 12. 2022

2022년 9월 둘째 주 브런치 일기

8월은 언제 지나가 버린 거야?

#1

지인과 작업하고 있는 원고는 2차 수정을 완료하였다. 말이 '2차'지 그동안 한 과정을 보면 '3.5차'와 다를 바 없다. 나름 브런치에서 열정 페이 글쓰기에 단련되었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슬슬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다.


'아니 뭐 내가 뭘 써도 결국 선생님 스타일로 수정될 거면 글쓴이가 꼭 나여야만 할 이유가 있나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동안 작업한 게 아까워서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쨌든 결과물이라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게 아마 '매몰 비용'이라는 건가 보다.


문제는 그 결과물이라는 게 언제 나올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험난한 항해를 하고 있다. 다들 지쳐가고 있고 나 또한 그렇다.


게임 업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발매 연기'가 생각난다. 기다리던 게임이 또 발매가 연기될 때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는데, 참으로 사람 일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어렸을 땐 내가 열심히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고 보니 하늘이 도와야 하는 부분이 점차 많아지는 느낌이다. 어떤 의미론 맥이 풀리는 기분이다.


#2

브런치엔 글을 못 쓰고 있긴 하나, 글쓰기 자체를 손 놓은 건 아니다. #1의 작업도 있지만, 일상적으로도 글은 계속 쓰고 있다. 바로 환자 차트이다.


어떠한 일로 차트를 복사해보면 알겠지만, 의사마다 차트 쓰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의사는 정말 간단하게 적는데, 나는 꽤 자세하게 적는 편이다. 누가 잘하고 못 하고는 없다. 간단하게 적는 의사가 효율적인 거고 내가 미련한 것일 수 있다. 어차피 환자는 똑같은 치료를 받고 가고 그걸로 진료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차트는 보이지 않는 업무이다. 거기에 쓸데없이 시간을 할애한들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다.


차트를 자세하게 적을수록 시간이 더 걸리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외래 환자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료가 우선이니 자연스럽게 차트 정리는 잔업이 된다. 외래가 끝난 뒤 진료실에 홀로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한다.


차트는 나만 보지 않는다. 때론 환자분이 다른 선생님의 진료를 보기 때문에 그 선생님이 내 차트를 볼 때도 있다. 병원장님의 경우 내 차트를 보면서 핀잔을 주셨다.


"선생님이 자세히 적는 건 좋지만... 너무 내용이 많아서 한눈에 안 들어와요. 선생님도 힘들지 않아요? 이렇게 쓰면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지쳐서 환자 '많이' 못 봐요. 보니깐 진료 끝나고도 집에 못 가던데... 다른 선생님들은 그 시간에 집에 가서 쉬잖아요. 선생님이 남아서 잔업 한다고 내가 추가 수당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세하게 쓰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요령'이 좀 필요해 보여요. 쓸데없는 일은 줄여보시고."


"네 원장님."


쓸데없는 일... 원장님 말씀이 맞다. 내가 꼼꼼하게 차트를 쓴 들 누가 알아줄까. 환자들도 모른다. 진료가 끝난 뒤에도 의사는 일한다는 걸. 내색은 안 하지만, 지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차트를 열심히 적으며 뭔가 특별한 의사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그들과 나눴던 대화가 그냥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뭔가 아쉽달까. 그런 사소한 흔적들을 좀 더 차트에 남겨두고 싶은 나의 욕심이다. 차트는 환자의 의료 기록이기도 하지만, 내 하루의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좀 고치긴 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나의 고용주가 안 좋게 본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면 그만큼 환자 순환이 더뎌지고, 가성비 떨어지는 과장을 좋게 보는 원장님은 없다. 두 번째는 나 자신도 여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는 24시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3

#1#2 때문에 상대적으로 요즘 브런치에 소홀하긴 했다. 일주일? 그리고 몇 주였던가? 글 안 쓰면 오는 알람에도 시큰둥해지고 내 브런치에 몇 명이 방문했는지도 모르고 산다. 결국, 브런치에 글 쓰는 것도 수당도 안 나오는 '쓸데없는 일'이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그렇지만 공모전 준비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여느 브런치 작가님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이전부터 다음 공모전을 위해 글을 모아왔다. 그것이 브런치 매거진 '이름 없는 병원 기담'이다. 감사하게도 내 글을 전부 읽어보신 분이 계신다면 '이름 없는 병원 기담'은 '일반적이지 않은 의사: 일반의'에서 내용이 이어진다는 걸 아실 것이다. 그런데 쓰다 보니 응급실에서의 일화가 비중이 커져서 둘을 정리해서 하나의 브런치북으로 합칠 계획이다. 그렇게 응급실 이야기로만 구성해서 공모전에 도전하고자 한다. 몇 개의 중복된 내용의 글이 발행될 텐데, 도배가 아니라 공모전 준비용으로 다시 쓰는 것이다.


#4

산부인과 이야기를 다룬 '우리가 처음 만난 곳: 산부인과'는 다른 포맷으로 재도전할 계획인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몇몇 당선 작가님의 후기를 보면 "탈락을 몇 번 해서 별 기대도 안 하고 예전에 썼던 그대로 제출했는데, '운이 좋아서' 되었네요."라고 하셨지만, 사람 심리란 게 그렇지 않은가. 탈락하면 운이 아니라 실력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을. 나도 좀 더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열정 페이 이상의 값어치를 인정받는 그런 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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