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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Aug 06. 2023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식

#1

지인 결혼식에 다녀왔다.


호텔에서 하든, 예식장에서 하든, 스몰 웨딩을 하든 결혼식을 하도 많이 다녀봐서 그런지, 이젠 신랑 신부 얼굴만 바뀌는 것 같고 다 그게 그거 같다. 그래도 이번 결혼식은 약간 흥미가 동했는데, 그건 신랑은 의사이고 신부는 한의사이기 때문이었다.


#2

어두운 배경에 은근한 조명으로 깔린 흰색 버진 로드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두 가문이 자리 잡았다. 한쪽은 의사 몬테규 家, 반대편이 한의사 캐퓰릿 家이다. 가족과 하객들이 서로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드는 목소리가 섞여 두근거리는 진동을 만든다. 이 장소와 시간만큼은 불행 따윈 다른 세상일인 것 같은 분위기가 묘한 위화감을 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까진 사회에서 나름 돈 좀 번다고 하는 두 가문 아닌가. 화려한 호텔 결혼식은 두 가문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역시 맞음을 반영하는 듯했다. 그러나 백조처럼 우아하게 밥 먹는 건 여기서나 그렇고 예식장 밖에선 의사나 한의사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발버둥 치는 건 똑같을 것이다.


'두 세력 간 평소 분위기라면 메스와 침이 날아다니며 불꽃을 튀기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그래도 많이 배운 분들이라 굳이 여기까지 와서 분위기 깨는 행동은 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안내받아 앉은 자리는 마침 한의사 선생님 7분이 있으신 테이블. 정체(?)가 탄로 나지 않도록 얌전히 밥을 먹으며 든 생각이었다.


#3

의사와 한의사가 앙숙인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만 '밥그릇 싸움' 정도로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긴 이건 의사나 한의사도 서로를 헐뜯을 때 '밥그릇 프레임'으로 종종 몰고 가니까 누굴 탓하리오.


그러나 의사와 한의사의 갈등은 남북 갈등이나 종교 갈등만큼 역사가 오래되고 복잡한 문제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개싸움'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이 싸움에 소모되는 사회적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의학 전부를 (진위를 떠나서) '사기'라고 열을 내는 "일부" 의사는 너무 무례하고 오만하다. 그렇다고 이에 발끈해 한의학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양방 치료를 배척하는 "일부" 한의사도 광신도이다. 이 둘 사이에서 환자는 병원과 한의원 중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을 겪는다. 병원에 갔다가, 한의원에 갔다가, 다시 병원에 가는 식으로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도 무시 못 할 거다.


학문에 익숙한 사람이면 그나마 스스로 사실 확인 하면서 자신이 만족할 치료를 받으면 된다. 이 치료법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던 건지 요즘은 구글 검색하면 관련 논문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단, 의원/한의원 홍보용 쓰레기 논문도 많아서 주의는 필요하다. 최대한 유명한 저널에 실린 걸 보도록 하자. 학자들이 '내 논문도 여기 한 번 실려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꿈꿀 정도 수준의 저널에 등재되어야 의학 교과서에 실리고, 나머지는 소리소문없이 묻힌다. 어찌 보면 학계도 공모전만큼이나 치열하고 비정하다.


그런데 논문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쩌나. 그럼 대신 정보를 쉽게 설명해 줄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문제는 요즘 세상이 정보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다. 질병 하나 검색해도 의사가 이러쿵저러쿵, 한의사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질환 설명은 의학적으로 하길래 '의사 선생님인가?'하고 보면 결론은 갑자기 "치료는 침과 한약입니다"라고 하니 환자도 헷갈린다. 마치 몸통은 하나요 머리는 둘인 괴물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두 머리가 서로 물어뜯으니 기이하지 않을 수 없다.


#4

계속된 갈등에 염증을 느낀 일부 의사와 한의사는 '의료일원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애당초 의학과 한의학이 분리되어 시작한 것이 문제라는 것. 중국과 일본은 구체적인 방식은 다르지만, 의사와 한의사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중국은 강력한 국가 권력으로 의사의 불만을 찍어 누른 느낌이고, 일본은 애당초 '한의사'라는 개념이 없고 그냥 의사가 한약도 처방한다. 그게 꼭 한약이 효과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의원이 영양제 팔 듯 끼워 파는 '보조 역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만약 한국이 의료일원화가 된다면 일본과 비슷한 형태로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그래도 아마 시간이 100년은 더 흘러야 할 것이다. 두 집단이 충분히 몰락해서 '이 정도면 뭐 둘이 합쳐도 상관없겠는데?' 정도가 되면 모를까... 지금은 의사, 한의사 외에도 얽혀있는 이해관계가 너무 많아서 불가능하다. 어느 날 의협회장과 한의협회장이 갑자기 더위 먹고 야합하여 "오늘부터 우리 합칠게용~♡"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결국 이 지겨운 싸움을 계속 보고 있어야지 뭐 어쩔 수 있나.


#5

다만, 오늘 이 결혼식을 보니 의외의 곳에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다. 의사-한의사 부부, 의사-한의사 형제, 의사-한의사 부자 등. 주변 사람들을 보니 의외로 이런 관계가 꽤 많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꽤 훌륭한 분산 투자 아닌가. 비록 세계관은 달라도 결국 한통속이 되어 통일에 한없이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둘이 앙숙임을 생각하면 다소 어색한 모습일지도 모르나, 인간사라는 게 원래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세상사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오래 사는 길이겠지.


아무튼, 내 다음 세대는 누구에게 진료받게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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