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가 그러하니 의사는 순순히 죽어주세요
어느 직능단체든 본인의 직업 가치가 희석되는 걸 달가워하는 집단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인의 것을 제외한 다른 직업의 가치가 떨어지길 바란다. 그래야 본인의 노동으로 번 피 같은 돈으로 조금이라도 싼값에 타인의 노동력을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계층 갈등이나, 시기, 질투 같은 감정을 다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실제론 이와 같은 요인까지 얽혀서 더 복잡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아직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으나, 내가 보기엔 그게 인간 사회이고 자연인 듯하다.
칼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 시대가 아닌 만큼, 아니 간혹 무력을 쓰더라도, 본인을 지키고 타인과 싸우는 중요한 무기는 언제나 '명분'일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나 사회에 헌신하고 가치가 있다" 또는 "우리가 지나치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같은 걸 대중에게 인정받는 힘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명분이 꼭 이성적인 논리로만 획득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때론 옳은 소리를 해도 감정의 파도에 밀리는 경우도 우린 많이 봐왔다.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경우도 그저 명분 싸움에서 진 것일 뿐이다.
의사 협회도 파도에 맞서지 말고 시대와 같이 흘러가면 좋을 텐데, 직능단체라서 그게 참 쉽지 않은가 보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의사가 반대했던 것 상당수가 '뺏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수술실 CCTV'도 내줬지, '원격의료'도 내줬지, '의료인 면허 취소법'도 내줬지, 여기에 '의대 정원 확대'도 내주면 뭐 아무것도 지켜낸 게 없다. 직능단체로서 그야말로 무능 그 자체인데, 그런데도 여론이 의사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마 의사 협회가 저 4개 중 하나라도 반대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전략적 모습을 보였다면 파업으로 나빠진 여론이라도 좀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다 논리적으로 반대할 만한 이유가 다 있긴 했어도 말이다. 이젠 의사 협회가 맞는 말을 해도 "의사들은 왜 '반대'만 하냐?"라는 말을 먼저 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다른 단체는 잘 모르겠고 보건의료 관련 직능단체 중에 기가 찰 정도로 일 잘하는 건 내가 보기엔 간호사와 한의사이다. 치과의사와 약사는 '이럴 땐 불똥 튀지 않게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게 중간은 가더라~'를 전략으로 잡은 것 같은데, 사실 그것도 참 잘하고 있는 거다.
간호사 단체는 아예 자신의 이권을 독립된 법으로 분리하는 '간호법'을 만들겠다고 한다. 일단 '자기들만의 법'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권을 준다. 왜냐면 타 직종의 간섭 자체를 일차적으로 차단하고 '우리끼리'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약사법). 간호사들은 이를 위해 파업하는데도 욕 하나 안 먹는 등 굉장히 명분 싸움을 잘한다. 덤으로 반대하는 의사를 사회의 악으로 설정하는 매우 좋은 전략을 쓰고 있다.
한의사 단체는 국민과 의사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잘 해왔다. 한국에서 한의사의 위치는 굉장히 오묘한데, 우선 장점은 'K-의학(=구 '신토불이')'이라는 친근한 이미지가 자연 형성되어 있다는 것과 의사가 비판받을 때 대안으로서 반사이익을 얻는 구조로 이미지 만들기가 굉장히 유리하다는 것이다. 국민은 어차피 의사나, 치과의사나, 한의사나 전부 '의사'로 보기 때문에 간혹 한의사가 잘못한 뉴스가 나와도 본문도 안 보고 '의사 놈들...'이라고 댓글이 달리는 걸 보면 '이런 것조차 한의사는 참 유리하네...'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한의사의 단점은 '구시대적' 이미지와 전문성에 대한 논란이다. 따라서 한의사 단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왔고 그 방향은 '뭔가 의사 비슷한 것'이 되고자 하는 쪽으로 가는 분위기이다 (한의사를 의사의 아류로 보는 의미 아님). 최근 잇따라 대법원판결을 받은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 허가'가 그러하다. 한의사에게 호의적이었던 민주당 정권 때 임명받은 대법원장의 판결이라는 점이 참 의미심장하다. 한의사 단체는 민주당을 매우 호의적으로 잘 밀어주고 이득도 잘 챙겨왔다. 반대로 의사는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는데도 이용하지 못할 정도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이것도 다 의사의 업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한의사는 먼 훗날엔 결국 '의사'가 되는 '의료 일원화'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지금 의대 정원을 2,000~3,000명 늘린다는 얘기마저 들리던데, 그래도 의대 갈 실력이 안 된다면 한의대에 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의사 단체의 또 다른 고민은 한정된 파이에 비해 한의사가 너무 많다는 것인데, 이를 해결하려는 방법이 너무 기발해서 기록을 안 할 수가 없다. 최근 의대 정원 확대 논의에 편승하여 한의사 단체는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가 선심 써서 한의대 정원을 좀 (가능한 한 많이) 내어줄 테니, 그걸로 의대 정원을 늘려주세요."
난 이걸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겉보기엔 한의사가 자기 지분을 국가의 대의를 위해 헌납하는 숭고한 희생! 그렇지만 한의사 수를 줄여서 우리 회원의 경쟁은 완화하고 의사에게 폭탄을 던져야지! 이런 묘수는 누가 생각해 낸 거야? 한의사 협회엔 제갈량이라도 있나 보다. 의사는 그럴 거면 차라리 한의대를 폐과하고 '의료 일원화'로 가라고 어이없어했지만, 한의사의 목적은 수를 줄여 직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거지 절대 문을 닫는 게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의대 정원 확대가 코앞에 다가오니 의사 협회도 한의대 정원을 받는 방안을 재고 중인가 보다. 참 뭐가 어떻게 될는지...
의료계가 진짜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도 의사지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의사 협회는 과연 파업을 진행할까? 정부의 실제 발표를 봐야겠지만, 의사들 분위기가 회의적이라 시위는 좀 해도 아마 파업은 못 할 것으로 예상한다. 실컷 뚜드려 맞았는데도, 욕까지 먹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고 조용히 입시 관련주나 좀 사두는 게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