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들을 읽을 때마다 (지금은 내린) 제 기존 글들이 초라해지는 걸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당당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만'이었고, '차별화'라고 생각했던 건 '출제 의도를 모르는 것'이며, 나만의 '개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조악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도 좀(?) 쓰고 그림도 좀 그린다는 것은 시너지 효과가 아니었고 어쩌면 '글도 그림도 안 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어요.
요컨대 소설이든 논픽션이든 글을 예리하게 벼려내야 공모전장에 비로소 '응모'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선도 아니고요. '운이 없었다'는 적어도 그 정도는 하고 얘기해야 하나 봅니다. 그런데 얼마나 예리해야 되는 걸까요? 그건 또 아무도 모르죠.
다만 그 과정에서 한 때 내 글들에게 가졌던 애정이 자기혐오로 바뀌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악에서 구하옵소서.
배순탁 심사위원은 논픽션 다섯 작품을 선정하였어요. 그렇지만 에세이나 실용서는 아니고요.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작품들이에요. 《한국과 일본의 문화역전》, 《King이고 싶었던 Queen》, 《카피가 되는 고품격 헛소리》, 《이미지로서 패션, 장르 속 여자》, 《조선인 포로감시원》이에요.
배순탁 심사위원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그나마 가장 따뜻한 심사평을 해준 분이에요. 비록 실질적으로 도움은 안 될지라도요. 혹시 《압구정》에서 배우신 건가요? 심사평에서 참고할만한 건 이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선택을 가르는 건 심사위원의 취향이다. 심사위원 개인마다 쌓아온 읽기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 배순탁 심사위원 총평 중
배순탁 평론가가 선정한 작품들은 '덕후'같은 것이 특징이었어요. 《한국과 일본의 문화역전》은 작가 본인부터 '아재덕후 공PD'라고 했고, 나머지 작품들도 매니악한 것이 특징이에요. 미안해요, 뭔가 덕후보다 고상한 단어를 쓰고 싶은데 잘 떠오르지 않아요. 역사 덕후, 문화 덕후의 글이에요. 배순탁 평론가도 문화 쪽에 일가견이 있을 테니 더더욱 취향저격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어차피 작품이 어떤 심사위원을 만났는가와 관련된 운이니깐 넘어갈게요.
찾아보니 이들은 전부 출간 작가들이고 어떤 분은 이미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당선 경험도 있는 분이에요. 이것만 보면 매번 되는 작가만 또 되는 게 현실일까요? 그렇지만 정말 잘 쓰시긴 하는 걸요. 원래 다큐멘터리 같은 글을 좋아하긴 하지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목적은 배워서 나도 좀 써보자는 거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해보았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작가들이 '덕후'라는 거예요. 연관된 일을 하시는 '덕업 일치' 작가도 계신 것 같기는 한데, 다른 작가들은 일종의 취재를 한 것이죠. 그러니까 그 작가보다 인터뷰를 해준 전문가 (직접 경험했던 본인)들이 관련 내용은 더 잘 알 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전문가들이 직접 써도 그런 글은 못 쓴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아요? '논픽션'인데.
전 의학 관련 글을 쓸 테니깐 예를 들어 볼게요.
'의학 지식도 있겠다 (별로 겪고 싶지 않은...) 희한한 경험도 있겠다. 완전 광맥이네. 그냥 퍼내기만 해도 책 하나 쓰겠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그래서인지 주변 의사들을 보면 책을 내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분들이 많지요. 물론 저도요. 의대생 때부터 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요즘 의대생들이 의사도 아니면서 '나의 병원 생활(?)' 유튜브도 하고, 웹툰도 하고, 브런치도 하는 것을 보면서, 약간 우습다는 그런 꼰대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요. 제가 의대생 땐 그런 플랫폼이 없어서 생각을 못 했을 뿐.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나는 소재만 제공 (법적인 문제는 추후 다루고) 하고 글은 글 잘 쓰는 작가한테 맡기는 협업 형태가 더 당선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요. 또한 당선 작품들의 소재를 저한테 주고 한 번 써보라고 했다면 그 브런치북은 당선되지 못했겠지요.
즉 전문적인 지식이 좋은 소재와 유리한 조건이 될 순 있지만, 좋은 글이 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예요.
그래서 제가 느낀 배순탁 심사위원의 심사 기준은 '연마된 전문성'이에요.
p.s. 어차피 이 글은 공모전 용도 아니니 결론 뒤에 사족을 좀 더 붙일게요. 언젠가 써야지 했던 소재인데 관련이 있는 내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위의 '협업 형태'는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는 병원 홍보 수단이에요. 댓글 알바 따윈 구식이지요.
만화를 좋아했던 전 의사 이야기를 웹툰으로 그리고 싶다는 생각(만)을 많이 했었어요. 꿈같은 거죠. 잘 되어서 드라마화 (슬의생 잘 봤어요~)도 되는 그런 망상 같은 것도 해보고요. 나만 그랬나요? 그런데 그림을 좀 그려보면 아시겠지만 이게 굉장히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라는 걸 아실 거예요. 작문과 작화 중 무엇이 더 쉽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그림의 진척 속도는 굼벵이보다 못하지요. 그렇게 그린다 해도 볼 때는 수초 만에 스크롤되어서 소모돼요! 도저히 그걸 병원 생활을 하면서 할 수가 없었어요. 잠잘 시간도 없는데 말이에요. 훌륭한 핑계일 수 있지만요.
그러던 어느 날 도전 만화에 《○○○ □□과》라는 만화가 등장했어요. 저는 충격이었죠. 비록 내용은 무슨 교육 만화 같은 느낌이었지만 (마치 정부 정책 홍보 책자 같은데 들어갈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댓글 반응도 좋았고, 특히 놀라운 건 작화가 나쁘지 않은데 분량도 있었어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아니 어떻게 채색도 하고 음영까지 다 넣었지? 이 의사 백수야?
브런치에 에세이가 넘쳐난다면, 도전만화엔 일상툰이 넘쳤어요.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소재이니깐 어쩔 수가 없나 봐요. 그래서 의학물은 마이너 해도 누군가는 목말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의사(?)가 먼저 선수를 친 거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아니 난 하나도 그린 적 조차 없었는 걸요. 그래서 《○○○ □□과》를 추적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엥? 《○○○ □□과》는 고작 3화인가 하고는 급 종료했어요. 휴재도 아니고 진짜 황당한 결말을 내고 끝내버렸어요. 저는 이게 뭔가 싶어서 '○○○ □□과'로 검색을 해보았지요. 그 결과 알 수 있었던 건 그 이름으로 그대로 운영하고 있는 병원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한 광고 업체를 찾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광고 업체 홈페이지를 보니 '우리가 이러한 작업을 했습니다.' 하는 포트폴리오로 《○○○ □□과》가 떡하니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름하여 웹툰 홍보! 도전만화엔 그런 티가 전혀 없어서 의사 본인이 하나하나 쓰고 그린 줄 알았는데 (실제로 원장님이 그린 만화처럼 홍보했어요) 너무 순진했던 거지요. 아마 연재가 급 종료되었던 건 원장님과 광고업체 간에 뭔가 계약이 급하게 종료되어서 그랬겠구나 짐작이 되었어요. 아니 근데 업체도 말이죠. 그런 홍보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안 들키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떡하니 포트폴리오라니...
물론 그들이 비난받을 짓을 저지른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당시엔 좀 현타가 왔던 것 같아요.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싶은 그림을 하지 못 하고 협업이라는 하청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 그것조차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남의 이름으로 들어가고. 그러다 진짜 《○○○ □□과》가 정식 웹툰이 되면 어쩔 뻔했을까요? 또 한편으로는 전부 컨설트를 받으면 내가 혼자 한 것보다 훨씬 퀄리티 있는 작품들이 나오는데 나의 오리지널리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컸어요. 또 그런 핑계를 대며 저는 그저 기존에 하던 일을 묵묵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닥터앤닥터 육아일기》가 도전만화에 등장하게 됩니다.
한편 시간은 흘러 병원 홍보도 바야흐로 유튜브 시대가 되었어요. 《○○○ □□과》 원장님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아보니 유튜브 하시고 계십니다. 아 브런치는 안 하시냐고요? 과연 어떨까요?
아무튼 배순탁 심사위원의 선정 작품들을 보니 저도 연마하여 그런 '공산품'들을 베어내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차올랐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어?'라는 무언가요. 물론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전 솔직히 그냥은 쓰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제가 속물이라서 그런지 목표가 없는 건 지지부진하고... 그런 의미로 공모전에 또 도전할게요. 또 이상한 글이 올라와도 그러려니 해주세요.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