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에르난 디아즈
<트러스트>로 유명한 에르난 디아즈의 2017년에 발표한 첫 장편 <먼 곳에서>를 새벽에 일찍 깬 김에 읽어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11시까지 스산한 감각에 사로잡혀, 몽롱하면서도 실제적인,
책의 활자와 동공 앞에 끼어있는 완벽할 만큼 고요하고 웅성거리는 공간이 창조되고,
동시에 정작 나의 감각은 마치 노이즈 캔슬링된 무선 이어폰을 끼고 앉아서 생생한 무대 위 관람객이 된 것처럼,
그 고요한 와중에 호칸과 호칸의 발바닥이 딛고 있는 끝없는 대지, 먼지와 태양에 더럽혀지고 짓무른 피부와 또 어느새 가죽을 다듬는 그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점액질이 풀처럼 끈적이는 것을 느끼고, 또 온갖 짐승의 냄새들 악취들 공포와 죽음의 냄새에 숨 막힐 듯 매스껍다가도, 무방비한 채로 노출된 겨울밤의 지옥 같은 공기, 투명하고 쥐가 난 듯 휩쓸려오는 진공 같은 휘몰아침에 계속 눈뜨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달까.
이 장편은 어떤 의미에서 괴물 같은 책이며 한없이 아름답고 느리고, 어떤 의미에선 몽환적인 꿈같은 책이다.
지극히 문학적인 작가임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숙명처럼 또는 의무감에 이 책을 맞아 심신의 고통과 정신적 공허감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에르난 디아즈는 라틴아메리카 혈통이지만 스웨덴에서 자라서 스웨덴어로 생활을 해야 했다.
장편을 쓰기 전 보르헤스에 관한 연구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가 어렸을 때 보르헤스의 스페인어 원저를 보았을까 나중에 대학 공부를 하며 영어로 책을 읽었을까 문득 궁금하다.
이러한 이중언어적 배경이 이 책 <먼 곳에서>의 주인공 호칸에게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아메리카라는 무대를 던져준 게 아닐까?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이 책이 인간적 이성의 도구인 '언어'외의 다른 이성적 도구들 만으로도 충분한 고독한 생애의 재료가 됨을 알 수 있다.
이 광활한 사방이 뻥 뚫리고 각자의 욕망과 전통과 관습 또는 종교적 가치를 따라 이동하는 행렬에 호칸은 때로 휩쓸리고 때로 빠져나오지만,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저 야생의 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짧은 순간 해부학적 지식을 전수해 준 박물학자와의 교감과 만남의 시간은 웅장하면서도 효과적이다.
또 하나, 원대한 모험을 앞에 두고 잃어버린 형제의 존재는, 마치 원죄처럼 호칸에게 존재 이유를 부여하지만, 독자의 기대를 늘 배반하는 호칸의 여정에서 형의 형상은 이제 자신보다 어린 존재로 변모한다. 그를 찾으려 하는 모든 기대와 열망은 어느 순간 퇴색해지고, 그는 자신이 만든 황야의 요새와도 같은 자연을 변형시킨 구조물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 뭔지 모르고 기다리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밤은 그를 지나간다.
모든 것이 유의미하지만 또한 모든 것이 무의미하며 판독을 요하고, 그럼에도 그의 움직임은 거대한 거구에서 솟아 나온 신중한 몸짓으로 고요함을 종용하고, 때로는 생존의 바쁜 신경질을 요구한다. 그는 어떨 땐 '바틀비'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떨 땐 '흉포한 살인자'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떨 땐 '의술의 천재'로 변모하기로 한다.
의도적으로 호칸의 욕망에 눈가리개를 씌운 작가의 의도를 따라 독자는 그 주변을 맴돌게 되고, 내내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어떤 안타까운 심정에 놓이게 된다.
그가 떠나온 곳을 알지만 가야 할 곳을 모르기에, 말이 통하지 않아서, 또는 애초에 말이란 게 불필요한 이 기이한 모험의 내력은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또 너무나 생생해서 지나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영화 <레버넌트>, 또는 황야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에서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지만 주연 배우의 그늘에 가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스러지는 엑스트라의 기이한 삶과 같은, 도대체 어떤 꿈들이 그가 혼자 있을 때 스멀스멀 기어 나와 그의 단단한 잠의 재료가 되었을까 고개를 젖히며 가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면 생각하게 된다.
p.s. 1. 호칸이 박물학자와 만나서 동물계통학 실습(?)을 하마 무수히 많은 동물을 해부하면서 의학기술을 익혔다는 설정은 드물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치료사'이며 동시에 '살육자'로 나중에 전설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실존 혹은 생존의 영도는 바로 나 혹은 동물의 신체를 통해 지각하게 됨으로, 호칸의 생존이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 작가가 의도한 설정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해부와 치료가 연결된다는 의미는 뛰어난 메타포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