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스 베르푸스 <아버지의 상자>
'가족, 혈통, 상속에 대한 도발'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부제를 가진 책
일단 뭔가 가치판단을 내리긴 어려운 책이다
매우 문학적으로 시작해 곧장 언어와 자본주의 시스템 그리고 고전과 성경의 논의로 이어지다가 상속법과 가족이란 무엇인가?, 인간, 인간의 이름들, 그리고 국가는 어떻게 실증적으로 다시 기술되고 그 근간을 이루는 문제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다시 되짚어가야 하는지
온갖 것들을 다 건드리는 방향으로 가는데
80프로 정도 심지 굳은 작가의 문체가 그것을 뒷받침한다면 20프로 정도는 상당한 비약을 감행하며 도발 자체를 위한 도발로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다 읽고 나니 이 에세이들이 강연을 위해 쓰인 것임을 알았다
순간 느껴졌던 것은 약간 희미한 배신감인데
이 작가가 25년 동안 아버지의 상자를 치우지 못한 것에 대한 어려움, 무관심 또는 근본에 대한 회의, 그 불안과 일부러 눈감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반성과 그 근원적인 부분에 대한 집착을 무척이나 정치적인 방식으로 글쓰기를 했다는 혐의이다
내가 이런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를 거부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런 숨기고 싶은 과거라는 것들의 망령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픽션과 현실의 재구성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화해나 감정적 해소 이런 문학적인 프레임을 만드는 게 아닌,
자신의 불우한 청소년기의 삶의 근원이라고 할만한 아버지의 부재와 단절을 복지국가 스위스의 사회 구조를 분해하며 그 문제점을 실증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상자를 통해
유산과 자신의 가계와 국가 그리고 국가의 언어인 법 그리고 체계들을 모조리 해체시키려는 원대한(?) 의도를 품고 있는 에세이인 것!
아버지의 상자를 언박싱한 김에 스위스라는 국가도 덤으로 언박싱해 보려는 기발한 의도?!
그리고 그러한 곤조를 엄청난 열의에 차서 기술하고 있는 그런 책이라
뭐랄까 좀 겁나는 종류의 글 같다
이 작가는 실제로 자신이 속한 계급이나 사회적 위치의 자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치적 의견을 꾸준히 게재하는 그런 행동하는 지식인의 유형일 것 같다 신문 기자들의 반은 그를 지지하고 반은 그의 의견을 유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인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여하튼 매우 문학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제목과 짧은 분량에 혹해서 책을 집어 들었다가
두두두두 쏟아지는 사변적인 언어에 난타당해 정신이 얼얼해지는 무서운 그런 종류의 신선함이 있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