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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준 Aug 13. 2019

칭찬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이유

가장 빛나는 계절은 바로 오늘이었어



들창코는 코끝이 들려 콧구멍이 보이는 코다. 사전에서 들창코를 찾아보니 벌렁코, 납작코 등이 따라온다. 아마도 ‘예쁜 외모’와 들창코는 친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시장에서 만난 로빈슨에게 벳시 할멈은 인사하며 말한다. “네 들창코에 축복이 있기를”이라고.


딱 그 상황만 떼어놓고 본다면 ‘저 할멈은 왜 시비야? 자기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고 있는 주제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책에 분명 ‘할멈의 류머티즘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라고 나오긴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들창코에 축복을 비는 벳시 할멈의 인사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배려 깊다. 왜냐고? 로빈슨은 꼬마 돼지다. 꿀꿀 꼬마 돼

지. 게다가 코에 은색 코걸이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선 송아지의 코를 뚫어 코뚜레를 하고 고삐를 매는 일이 있지만 동서양 통틀어 돼지에게는 코뚜레가 필요 없다. 그렇다. 꼬마 돼지 로빈슨은 ‘멋져 보이기 위해’ 들창코에 은색 코걸이를 한 ‘패피’인 것이다! 패피, 그러니까 패션 피그!


만약 로빈슨에게 벳시 할멈이 “네 뾰족코에 축복이 있기를!”이라거나 “네 오뚝한 콧날에 축복이 있기를!”이라고 인사했다면 로빈슨은 무척 상심했을 것이다. 콧구멍이 잘 보이는 들창코, 벌렁코, 납작코, 결국 종합하여 돼지코는 돼지의 시그니처인데 ‘오뚝한 콧날이나 뾰족코’ 따위 인간의 코에나 어울릴 법한 말을 한다면 실례 아니겠는가. 심지어 로빈슨은 코에 은색 코걸이까지 한 패피다. 한껏 힘을 준 코에 축복을 빌어주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돼지에겐 돼지다운 돼지코에 축복을 빌어주는 게 맞다. 사람에겐 사람다운 면, 사람의 시그니처에 축복을 빌어주는 게 맞다. 그렇지 않다면 실례다. 나는 당연하게도, 아주 당연하게도 ‘인형 같은’ 외모를 지니지 않았다. ‘빨래판 같은’ 복근도 없다. 따져보면 끝이 없는데, 앵두 같은 입술도 없고 우물처럼 깊은 눈동자나 동굴을 울리는 듯 매력적인 저음을 지니지도 않았다. 비단결 같은 머릿결 따위도 없다. ‘무엇무엇 같은 무엇’을 따져봤을 때 내게 어울리는 건 단 하나, 사람같이 생겼다 정도?

인형 같은 외모는 장난감 가게에서 찾으면 된다. 백인, 황인, 흑인, 금발, 흑발, 백발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범위의 인형 외모를 만날 수 있다. 빨래판은 빨래터에서, 앵두는 청과물 시장에서, 우물은 시골 오래된 집에서, 동굴은 산자락에서, 비단은 동대문 혼수・침구・한복 취급점에서 찾으면 된다. 인형, 빨래판, 앵두, 우물, 동굴, 비단 등등은 사람의 시그니처가 아니다. 본디 인형이 사람을 흉내 낸 거다. 사람 외모를 따라 인형을 만든 거지 12광년 밖 미미은하계의 공주로부터 계시를 받아 인형을 만든 게 아니다(물론 미미은하계 따위도 없다). 빨래판은 손빨래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만든 거지 배에다 새겨 넣으라고 만든 게 아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초콜릿 복근 같은 것도 있다. 초콜릿은 상사에게 갈굼당하고 빡칠 때, 당 떨어질 때, 또는 밸런타인데이 때 진짜 싫은데 회사 남자 상사들에게 돌릴 때 쓰는 거다. 더구나 초콜릿은 다량으로 섭취할 경우 복근이 순식간에 희미해지는 대단한 식품이다. 초콜릿을 좋아해서는 선명한 복근을 만들 수가 없다.

여기까지 왔으니 눈치챘을 거다. ‘무엇무엇 같은’ 따윈 개나 줘버리라지. 사람답다, 나답다가 최고의 찬사다. 세상은 무생물이나 상품에는 그러질 않는데 유독 사람의 외모를 얘기할 때 비유법을 많이 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사과폰 같은 은하수폰’이라고 제품 설명을 하겠는가? 사과폰이면 사과폰, 은하수폰이면 은하수폰인 거다. 제품들은 자신만의 시그니처,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죽도록 노력한다. 비교당하면 싫어한다. 굳이 비교를 해야 한다면 이전 제품, 예컨대 6과 7을 비교한다. 7이 6보다 이거 이거가 더 나아졌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사람은?


영희 같은 철수는 의미 없다. 철수는 철수일 뿐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어제의 철수와 오늘의 철수를 비교해야 한다. 7월 6일의 철수와 7월 7일의 철수를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가 지났다면 그 하루만큼 반보라도 더 나아졌는지를 비교하는 건 좋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를 비교하는 건 좋다. 그런데 왜 다른 은하계의 인형과 다른 나라의 위인과 옆 동네의 누구와 엄마 친구의 아들과 친척의 딸과 비교하는가. 벳시 할멈도 꼬마 돼지에게 그러지 않는가. “들창코에 축복을”이라고. 류머티즘이 한결 호전된 벳시 할멈도 알고 있다. 돼지는 돼지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비교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두고 하는 거라는 걸.


불행의 시작은 남과의 비교이며 행복의 시작은 오늘의 나에 대한 감사다. 감사는 인형 같아서, 빨래판 같아서, 앵두 같아서, 우물 같고 동굴 같아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나이기에 감사하는 것이다. 뭐? 지금 자신의 모습이 별로라고? 어떤 기준으로 별로인 건가. 나를 그냥 내 기준으로 보면 그저 나일 뿐이다. 잘난 이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못나 보일 뿐이고. 그래서 나보다 못난 사람하고 비교한다고? 나보다 힘든 사람보단 내가 조금 더 나으니까 감사할 수 있다고? 그건 정말 아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 열등감만 남고, 낮은 사람과 비교하면 비루함만 남을 뿐이다. 높은 곳과 비교하면 초라해지고, 낮은 곳과 비교하며 애써 위안하려 하면 천박해질 뿐이다. 그냥 딱 내가 선 곳, 내 눈높이, 내 위치의 나를 내가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

못났다 잘났다 평하는 건 ‘기준’이 있다는 거다. 그 기준이 나라면 그냥 나는 나일 뿐이다. “돈도 못 벌면서 밥은 왜 이렇게 많이 먹니?”에서 기준은 ‘돈을 벌면서 밥은 적게 먹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 돈은 못 벌지만 입맛이 좋아서 밥을 많이 먹고 있는 내가 기준이라면 그냥 ‘나는 밥을 먹는다’로 끝난다. 얼마나 심플하고 아름다운가! 대개 복잡한 것은 가짜다. 주어와 동사만으로도 세상은 설명이 된다. 나는 먹는다. 나는 잔다. 나는 산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노력한다. 나는 나아진다. 나는 충분하다. 뭐, 조금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충분하다’ 같은 형용사도, 때로 부사도 쓸 순 있다지만 단순함은 신의 영역이자 축복의 일이다. 복잡함은 인간의 영역이자 불행과 피로의 일이다.


길을 나서서 좋은 사람 만나거들랑 무엇무엇 같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서 맘껏 칭찬하고 사랑해주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볼 때, 거울에서 웃고 있는 나에게도 똑같이 대해주자. 내가 나라서 칭찬해. 내가 나라서 좋아. 기준은 나 자신이니 비교하지 말고 사람으로, 나로 살자.




1.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면서 자기애가 넘쳐 너무 오랫동안 중얼거리면 식구들에게 오해받을 수 있다. 짧게 하자.

2. ‘비교하지 말라, 사람답게, 나답게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하면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다. “못생긴 사람이 꼭 켕겨서 저러더라? 잘생기고 예쁘면 얼마나 편한데?”

……. 난 못생기지 않았다. 잘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세종대왕님이 창제한 한글을 아주 몹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못생긴 것과 잘생기지 않은 것은 아침밥과 저녁밥만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내 피부 촉촉해지고 예뻐지라고 마스크팩 한 장 안 사준 사람이라면 그딴 소리 조용히 넣어두길 바란다. 조용히 갈 길 가라. 나는 나답게 살련다. 내 멋대로, 생긴 대로 사는 게 가장 신난다.


"내일 무지개가 뜨는 건 오늘 비가 왔기 때문이야"

"문을 열어 봐, 빛나는 계절이 와 있어"

무모하고 제멋대로인 토끼, 피터래빗 이야기


*이 글은 <가장 빛나는 계절은 바로 오늘이었어>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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