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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준 Nov 05. 2019

아이에게 상처되는
부모의 흔한 태도들

소란한 감정에 대처하는 자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 존재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정한 호흡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옆에 있는 연인의 팔을 베고 아무런 걱정 없이 입을 벌리고 자도 되는 것, 싸우더라도 헤어진다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닐까, 내 약점이 그에게는 전혀 약점으로 보이지 않은 것.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때 사람들의 얼굴이 가장 아름답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예뻐지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만약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례로 부모로부터 필요 없다는 소리를 버릇처럼 듣고 자란 사람이 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을 위로했다. 지금 자신에게 못되게 굴어도 세상에 태어날 때만큼은 사랑받았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폭언과 함께 부모가 낙태를 시도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위안이 산산조각 났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부모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는 충격과 함께 존재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는 완전히 자신을 놓아버렸고 약물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정신적 지탱이란 이다지도 중요하다.



아이는 그 자체가 의미다


부모들은 아이의 필요성을 섣부르게 단정짓는 실수를 범한다. 20세기엔 과거로부터 이어진 남아선호사상의 영향으로 아들을 원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은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부모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아들을 낳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도 많았다. 딸들은 무시당했고, 한 상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면 그만인 존재로 여겨졌다. 과거에 아들을 선호했던 것은 농경 사회의 흔적이다. 노동력이 필요했고,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아들이 부모를 부양했기에 집안에 남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 돌하르방 코를 쓰다듬던 부모들은 사라졌다. 지금은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자신이 꾸린 가족에 몰두하는 아들과 달리 결혼을 해서도 부모를 찾아주는 딸이 사랑받는다. ‘딸 바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아빠들이 많아졌다.


성별에 상관없이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임에도 시대의 변화, 자신의 선호에 따라 기뻐하고 실망한다. 아이의 성향과 성격은 성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이라는 기준으로 일반화하여 선호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아이는 지지를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을 믿고 삶을 유지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었으면, 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말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기대가 부서진 것에만 초점을 두고 아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거나, 아이가 큰 후에 우스갯소리로 들려주기도 한다. 존재를 부정당했던 경험들이 아이의 마음에 슬며시 자리를 잡는다. 아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겠지만 마음속은 상처투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쓸모로 판단되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누군가의 목적과 필요에 의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 그것은 스스로 가치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적인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사물들과 다를 바 없이 목적성과 쓸모를 가지고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삶 밖에는 살 수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나의 쓸모를 부모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결정하더니,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우리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한다. 세상의 기준에 맞춰 행동하고,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도태되는 것이 두려워 애를 쓴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끊임없이 어필해야 하는 것이다. 성적이 노력에 비해 잘 나오지 않을 수도, 취직이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인데 마치 크게 실패한 사람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과정보다 결과에 중시하는, 기준치에 도달했느냐가 전부인 것처럼 평가한다.


어떤 청년이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1년 동안이나 주변에 합격했다는 거짓말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기사 아래에는 삶이 우습냐는, 죽는 게 쉽냐는 댓글들이 달렸다. 주변의 압박감 속에서 지옥을 맛보았을 그를 비아냥대는 말들이 가득했다. 쓸모 있고자 노력했고,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하다 거짓말을 현실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한 이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없음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다. 중년부터 이미 직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는 회사에 더 이상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버겁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점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인간을 노년기에도 끊임없이 발달을 계속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노인도 매일매일 새로운 피부조직을 만들어내고, 하루하루 성숙해지는 감정을 느끼고, 새로운 발달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쇠퇴의 속도가 발달의 속도보다 더 빠를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발달의 개념은 그런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것을 제외한 외적인 조건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에 인간의 발달 자체를 계속되는 것이 아닌 어느 순간 멈추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만이 우리를 나타내는 게 아니다


외재된 것에만 성공의 초점을 맞추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사회일수록 개인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그러다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지 못하게 되면 실패자가 된다.


낙오된 감정과 수치심은 개인만의 몫이 아니다. 그런 광막한 감정은 사회와 환경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견고하게 쌓아올린 지옥의 성과도 같다. 개인이 느끼는 감정들에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감하기 이전에 지쳐 쓰러진 이에게 버티지 못했다 비난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신의 가치를 쓸모로 증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신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 물건처럼 버려질 각오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쓸모 있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저 살아가기 위함이고 사는 데에 누군가에게 쓸모를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회에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까지 매도할 생각은 없다. 사회에서는 쓸모를 증명해야 자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음이 자명하다. 다만 자신의 가치가 ‘일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측정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사회의 평가 기준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감정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한걸음 물러나 감정의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소란한 감정에 대처하는 자세>


*이 글은 <소란한 감정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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