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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Dec 18. 2017

행위와 자제력

맥락 없이 단정 짓는 말은 소아적 유치함이다.

모든 행위와 자제력은 동일선상에 놓인다.

하나의 행위는 의도와 상관없이  표현이고 섬세한 내면이다.

굳고 무르고 강약과 설렘, 두려움까지도 속성으로 갖는다.

옳고 그른 시비에 걸리고 가치의 논의로 던져진다.

자제력은 행위보다 앞서있다.

숱한 행위를 잡아두는 게 자제력이다.

자제력이 없다면 세상은 행위의 실험장이 되고 만다.


누군가를 평가한다고 나서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느낌으로 기분으로 다가서는 일과 다르다.

단정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하나의 행위와 자제력은 같이 돌아간다.


드러난 일시적일 수 있는,

어쩌면 현상일 수밖에 없는

그게 내 이기적 발상에 위배되었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논의의 중심에 서있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까십 다루듯 떠벌리는 일은 미성숙된 자아이다.

나를 좀 봐달라고 보채는 유아의 칭얼거림에 다름 아니다.


논의의 중심도 아니고 쟁점도 상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주변 사람에게 혼란스러운 사고를 유발한다.

사람의 일상에서  필요하지 않은 감정적 소모를 불러내게 하여 

매우 피곤하게 만든다.


이기적 감정을 숨긴 체 혼자 격정적일 때는 의심한다.

뭣을 위하여 보채는지를 엄마가 갓난아기 다루듯 살핀다.

대부분 주변에서 갓난아기를 만들고 있다.

아기처럼 칭얼대느라  자제력은 발동되지 않는다.

오직 행위의 연속선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행위의 전후와 연관과 유별성을 따진다.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그 행위를

자제할 수 있었을까 없었을까를 본다.

그냥 바라보면 그만이다.

그러면 알게 된다.

발상의 시원과 말의 배경과 심리상태와

원하는 게 껌인지 사탕인지 쓴맛 일지 달달함 일지를.


그래서 하나의 행위에 수반되는 말의 품격이 정해진다.

말의 품격에는 자제력의 수위와 온도가 섞여 있다.

전후 맥락 없다면

소아적 칭얼거림으로 보채는 것이기에

그때는 모성으로 다가서야 이해할 수 있다.


누구도 맥락 없이 누군가를 단정 지을 수 없다.

내가 걸어보지 못한 길을 외경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걸어본 길만 가지고 다른 사람의 길을 깔아뭉개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하루의 작은 감정에서 출발하는 자제력이어야 한다.

머리가 아니다. 현실이다. 자제는 깃든 욕망을 스스로 제어한다. 

욕망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을 확고히 지배하는 주인이어야 한다.



자신의 모든 행위는 다른 행위와 사고, 결단 등을 이끌어내는 요인이 되거나 혹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일단 발생한 현상은 항상 어떤 형태로든 다음에 일어나는 현상과 단단히 이어져 있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은 행위 하나도 세계를 울린다.

변하지 않는 것은 더불어야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너도 나도 측은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일이다. 효제충신예의염치 중에서 제와 치가 으뜸이라는 생각이 그래서 부쩍 이 아침 끌린다. 제란 형제자매와 이웃 모든 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이니  사회적 소통 그 자체다. 그리고 치는 부끄러움과 창피함 욕된 것을 아는 행위이니 이 또한 행위의 밑바탕으로 충분히 든든한 격이 되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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