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타미 준의 비오토피아
제주의 역사는 슬프다. 조선 왕조 시대는 육지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출륙금지령 같은 특별한 주민 통제 정책을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주 인구 통계는 들쭉날쭉한 양상을 보인다. 뭍으로 나가 살 수 없게 법으로 막았으니 나가야 할 당위가 더 커졌던 것이 아닐까.
관리들의 수탈과 왜구의 노략질과 흉년으로 틈만 생기면 내빼려고 들었고 관리는 막았다. 육지 사람이 제주에 오는 것은 죽을 곳으로 알고 피했으며, 섬 사람은 육지에 나가는 것을 천당에 가는 것처럼 생각했다. 육지로 나와 해안 지방을 떠도는 수효가 늘자 새로운 칙령과 법적 조치도 강구하면서 드나듦을 엄중히 관리하였던 기록도 즐비하다.
17세기 초, 김상헌이 쓴 '남사록'에는 "제주에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량이 많은데다, 관리들이 사욕을 채우는 것이 또한 몇 배나 된다. 포작인(鮑作人)들은 그 일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는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다. 때문에 제주 여자들은 포작인들과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남사록'은 수탈에 견디다 못해 육지로 빠져 나간 포작인을 기록해 두었다.
제주는 공부한 사람, 벼슬한 인물, 정치 희생자의 유배지이다. 고려 우왕 8년인 1382년에 명나라에 정복당한 운남 양왕의 아들 백백 태자와 그 손자 육십노 같은 양왕의 자손들이 제주에 유배되었고, 1388년 명에 멸망당한 원의 달달친왕과 왕족 팔십 가구가 이섬에 유배되어 최후를 마쳤으며,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 삼백명에 이르는 많은 이가 한맺힌 귀양살이를 했다.
광해군을 비롯하여 왕족, 벼슬아치, 학자까지 다양한 구성과 조합이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 대정에 9년간 위리안치되었다 풀려났다.
그 외에도 삼별초, 민란, 천주교 난(이재수 난), 4.3 항쟁, 육이오와 피난민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9년부터 정부 대여 양곡을 찾는 농가가 거의 없어졌다 하니, 지금의 제주는 하늘이 준 아름다운 자연 환경으로 모든 분야가 넉넉한 지경에서 새로움을 모색하는 오늘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