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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형근 Jan 29. 2020

이제 겨우 숨 돌리고

내내 정리하고 또 흩트려 놓는다. 그 자리라는 게 주어짐이 아니라 등장과 퇴장의 잠깐 사이에 놓였다. 개미굴에 들락대는 일개미와 다를 바 없다. 내 것이라고 주어짐이 우스운 까닭이다. 선호라는 게 추구하는 대상에 달려 있겠지만 결국 손 타는 국면과 상황이 그이의 진면목으로 작용할 게다.

입으로는 세상의 부조리에 진절머리 치듯 차고 명징하여 우러러보는데 제 자식 자기 손 타는 행위에 대하여는 관대하다. 입과 스스로의 업이 비틀려 있다. 그러니 갓 쓴 양복이고 칡인지 등인지 후광이 엷다. 절로 믿음이 가다 되돌아온다. 바라보자니 면목이 없어진다.

해서 흩트려 놓고 끄집어낸다. 그대로 자리보전하게 둘 수 없으니 흔들어 섞어서 고른다. 옥석을 가리자는 게 아니라 욕심을 어떻게 부렸는지 되짚어 찾아내는 일이다. 왜 그랬을까. 그때와 지금은 어찌 다를까. 달라진 게 없는 것인가. 닳고 곪고 진물 나는 곳은 없었는가. 차 명상이라는 게다.

해서 버릴 것과 지닐 것의 구별이 바로 서는가를 뚜렷하게 직시한다. 정리하는 하루를 예비하여 차를 우린다. 흩트려져 난장인 세상 한가운데를 우직하게 중심 잃지 마라고 보온병 3개에 우린 차를 담는다. 어질러 놓고 모양내서 차 마시겠는가. 차맛이 달라도 메마른 입안을 헹구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이 구석 저 구석, 이웃과 남이 모두 엉켜 있다.

-20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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