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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Oct 18. 2023

층간소음의 습격(1)

고구마 백만 개 편

"이거 무슨 선언문 같아. 자기 정말 글 잘 쓴다!"

개복치 씨의 칭찬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잠시, 스스로도 내 꼴이 우습다. "제주 가서 글이나 써" 하는 사람들에게 "신나게 놀아야지 글은 무슨 글입니까" 하며 콧방귀를 끼었는데, 정말 글 한 자 안 쓰고 놀다가 마음 먹고 쓴 글이 다름 아닌 국민신문고 '민원'이라니. 민원글을 잘 썼다고 남편한테 칭찬받고 좋아하는 꼬락서니라니.



지난 2월 새벽 배로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부연 안개를 뚫고 셋집으로 향했다. 지난해 친구가 연세로 살았던 곳을 추천받아 계약한 집이었다.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연립주택이었다. 차로 실어온 짐을 나르며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보았다. 우리집 윗층, 윗윗층에 모 회사의 사옥(생활관)이 있는데 그 이용객들의 소음, 쓰레기 무단투기, 주차 관련 문제 등 피해와 관련해서는 어디어디로 연락하고, 조치가 되지 않으면 관리사무소에서 해당 회사에 직접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X됐다'와 '에이 설마'를 오가며 봄이 되었다. 내가 생각한 회사 생활관의 이미지는 집과 멀리 떨어져 제주 지사로 발령받은 직원 3명이 방 3개를 나눠 쓰면서 생할하는 모습이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라는 표현을 쓰기 위해 있는 건가보다. 이름은 생활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론 해당 회사 직원들의 휴양시설로 쓰이는 곳이었다. 짧으면 1박, 길면 3박을 하는 그 회사의 직원과 가족이 내 윗집과 윗윗집에 묵었다. 부부, 아이 셋과 부모, 3대가 함께, 어르신들이 단체로 오기도 했다. 렌트카도 계속 바뀌었다.


여행의 설렘과 해방감이 얇은 층 사이로 모두 전달되었다. 아이들은 뛰고 굴렀다. 복도 이쪽과 저쪽 끝을 우다다다 달렸다. 탭댄스 동호회의 워크샵이 열리는 듯 발망치의 향연이 이뤄지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불콰함이 안방 화장실을 통해 들려왔다. 누가 가구를 훔치러 왔나 싶을 만큼 가구 끄는 소리도 심심찮게 있었다. 밤 12시에 들어와 온 일행이 씻으면 청풍명월 계곡에 온 듯 흐르는 물소리가 계속 났다. 여행객은 지치지 않긔, 분명 나보다 늦게 잠들었을 그들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그들의 타임테이블을 아는 건, 그걸 감지할 만한 소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과 함께 공동주택 생활을 시작했으니 나름 경력자라 생각했다. 오래된 다세대주택의 월세방에서는 옆방 남학생의 코골이까지 다 들렸다. 부엌이 없고 화장실을 함께 쓰는 고시원 형태의 월세방은 늦은 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방문 여닫는 소리에 뒤척이기도 했다. 결혼 후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층간소음의 형태가 다양해졌다. 피아노 소리, 꼭 새벽 1~2시에 들려오는 쿵, 물건 떨어지는 소리, 저벅저벅이 아니라 쿵쿠루루루쿵 하는 발소리, 특정 시간에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 말싸움하는 소리. 어쨌거나 생활의 소리였다. 소음의 형태와 크기도, 시간대도 비슷했다. 어느 정도 예측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그랬다. 이 고통의 핵심은 예측 불가능성에 있었다. 어떤 날은 괜찮다가도 어떤 날은 3일 연속, '어제 그 사람들이 오늘은 묵지 않게 해주세요' 빌기도 했다. 그러다 개복치 씨와 나는 주차단속원처럼 차량번호를 예민하게 캐치하게 되었다. 우리 동에 '하', '허', '호'로 시작하는 번호의 렌터카가 주차되어 있으면 차종을 확인했다. 탑승인원이 많을 카렌스, 싼타페면 'X됐다', 아반떼면 '좀 나으려나?'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한국 공동주택 건축문화의 얄팍함과 휴가지 하이 텐션의 환장하겠는 콜라보였다.   


연락하면 된다는 그 연락처의 주인은 육지에 있는 해당 회사가 생활관 관리를 위탁한 업체의 직원이었다. 층간소음으로 고통받는 건 주로 밤 시간대여서 처음에는 그 연락처로 연락하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그리고 늦은 시간에는 연락이 닿지 않기도 했다. 이 공동주택의 관리사무소는 낮 동안만 직원이 있기 때문에 밤 시간의 층간소음은 알아서 해결, 확실히 각자도생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쫄보인 우리는 인터폰을 하지도, 직접 찾아가지도(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냐), 경찰에 신고하지도(이 조용한 동네가 얼마나 시끄러워질까, 참자) 못했다.

효과는 모르겠지만 향은 좋은 슬립 밤


층간소음 밑에서 밤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수면을 돕는다는 슬립 밤(sleep balm)을 사서 코밑에 발랐다. 수면귀마개를 종류별로 샀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수면명상과 수면 asmr로 채워져갔다. 9시 넘어 잠자리에 드는 아이는 "엄마, 윗층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이 안와!" 외치다 잠들곤 했다. 아이를 재우고 우리가 잠에 드는 10시 부근은 윗층 이용객들의 피크 타임. 하늘의 보살핌으로 그 시간에 사람들이 오지 않아 일찍 잠들었다가도 방심은 금물. 새벽 1시 넘어 깨어 3시 넘어서까지 잠 못 잔 적도 있었다. 이런 날들이 모이니 결국 수면장애가 되었다. 개복치 씨는 위에서 쿵쿵댈 때마다 자꾸 심장이 뛰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제주에 온 지 5개월, 우리는 인터넷에 '정신의학과'를 검색하고 있었다. (2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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