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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Apr 12. 2023

제주도에 와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부부가 함께 쉽니다

누군가 물었다.

“둘 다 쉰다고? 오~ 돈 좀 있나봐"


내가 휴직하고 싶은 만큼 남편도 지긋지긋한 회사 쉬고 싶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고 흔쾌히 결정한 일이었다(2년이나 쉰다고 할 줄은 몰랐다). 둘 다 쉬는데 아파트에 그냥 있자니 아쉬워서 1년살기를 택했다. 뭔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여유라면 여유겠다. 그렇다고 돈이 넘쳐나서 회사를 쉴 리가. 그랬다면 우린 회사를 때려쳤을 부류다. 남편과 나는 제주도에 가는 대신 우리 엄마에게 물려받은 14년 된 차를 계속 타기로 했다.


벌이가 없어지는데도 비교적 덤덤했던 내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배낭여행 할 때처럼 쓰면 돼! 난 마음 먹으면 정말 안 쓰고 살 수 있어."


‘무식하면 용감하다’를 증명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 휴직과 제주행을 결정하고(2022년 초순) 실제 제주에 오기까지(2023년 초순) 물가가 미쳐버렸다. 게다가 난 짜임새 있는 살림살이를 해본 적이 없다. 주식, 펀드, 적금을 들지 않고 월급 통장을 스쳐지나가고 남은 부스러기가 모이면 신협에 묶어두는 식이었다. 게다가 배낭여행 할 때라니. 그게 언제적인가. 지금 우리집엔 제철과일에 환장하는 초등생도 하나 있는데!


먹부림의 나날들


제주에 내려오면서 1년치 월세인 '연세'를 한꺼번에 내고 나니 주머니가 달랑, 했다. 게다가 지난달 남편의 월급을 끝으로 통장 입금란에 숫자가 찍힐 일은 없게 되었다. 그제야 카드값의 숫자가 숫자 이상으로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


"우리 한 달에 얼마나 쓰지?" "글쎄."


여기서도 나름의 '생활'을 할 텐데 지출 규모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시작은 그랬다. 결혼 10년 만에 노는 듯 살러 온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가계부를 쓰게 된 것이. 가계부의 꽃은 '리뷰'라지만 아직 목표가 없는 우리는 우선 매일의 기록이라도 충실하기로 했다. 그런데.


"와 이제 4월이 열흘 지났는데 벌써 식비가 OO만원이야."

"쿠팡 28500원 뭐 산 거야?"

"가계부 또 밀렸다. 언제부터 써야 하나..."


한 달 남짓 가계부를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가계부의 목표가 왜 중요하고 가계부의 꽃이 왜 리뷰인지를. 목표없이 적어나가다 보니 숙제처럼 느껴졌다. 내 안의 낭만이가 '제주도의 푸른 밤'을 노래하면 내 안의 인색이가 '빈대떡 신사'(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를 불러댔다. 휴직까지 하며 제주도엘 왔는데 소비 목표를 세운다? 푸합. 내년까지 쉬는데 이렇게 매달 쓰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마이갓. 그러다 어떤 날에는 엑셀을 더 잘한다는 이유로 가계부 작성이 내몫이 된 게 갑자기 불만스러워졌으며(니가 쓰자고 했잖아), 날 좋은 날 3일 전 영수증을 뒤지고 있자니 가계부쓰기가 인생의 커다란 시간낭비처럼 느껴졌다(니가 보는 유튜브는? 왜 매일 쓸 생각은 안 하는 거니?) 3월 가계부 리뷰를 다시 읽어 보니 한숨이 나온다. "식비가 많이 든다. 그렇다고 외식도 별로 안 했는데 식비를 더 줄일 수도 없고. 다음달에 좀 더 아껴봐야겠다."(뭘 어디서 어떻게? 분석이란 걸 왜 못하니?)


한때는 이런 대책없는 경제관념이 죄스럽기도 했다. 엄마들의 주식투자, 경제공부가 붐일 때였다(요즘도 붐인 것 같지만 열심히 모른 척 해본다). 한 후배는 아이에게 물려줄 게 없을 것 같아 주식투자라도 해야 하나 싶은데 너무 어렵다고 토로했다. 매일을 회사일과 아이 사이에서 바쁘게 보내면서도 무언가를 더 못해(줘) 죄책감 부스러기를 묻히고 다니는 우리들. 아이에게 돈 말고 건강히 옆에 있어주는 것, 다른 미덕을 물려줘야지 하는 결심이 초라해지는 나날들. 그걸 다 떼냈다고 생각했는데 제주도에 와서 다시 마주하려니 싫은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도 가계부의 덕목이란 게 있다.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사는지가 나를 말해준다"고나 할까. 가계부를 쓰기 전엔 몰랐는데 우리의 제주 생활은 아직 '여행'이다. 워후, 낭만이의 승리!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가 있는데 우리의 영화는 <술과 커피>다. 날씨가 좋아서, 날씨가 궂어서, 미세먼지가 심해서, 오늘은 귤이 학교가 일찍 마쳐서, 오늘은 귤이가 학교에서 늦게 오니까, 모든 게 적절한 이유였다. 육지에서도 거의 그랬지만 아이의 사교육비는 0원. 숲체험에 매달 4만원을 쓰는 것 외에 말 먹이주기 비용이 몇 천원 정도다.


귤이는 숲체험 하고 활보는 전시 보고 개복치는 커피 배우는 나날

유류비는 줄었다. 제주에서 어지간 한 곳에 가려면 왕복 1시간이고 주로 가는 마트도 왕복 30분이지만 육지에서 매일 차 두대로 출퇴근하는 것보다는 이동이 적다. 원래도 단촐했던 품위유지비는 더 줄었고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둘의 취미생활비는 와우! 개복치 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했던 목공예를 다시 배워보고 싶다며 강좌를 신청했고 지금은 가죽공예 수업을 듣는 중이며 나는 라탄공예를 배우고 있다. '손으로 하는 일의 즐거움'을 회복해가고 있음을 가계부가 알려주었다.


초등 1학년 아이와 매일 붙어 지내게 된 남편은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며 7만원 짜리 '싱잉볼'을 검색하고 있다. 나는 그 옆에서 이 글을 쓰며 말한다. "7만워어언? 그 돈이면 하나로마트에서 고기도 사고 회도 사는데?" 그러다 싱잉볼 음악 속에서 명상하는 모습이 떠오르며 미소가 차오른다. 아마도 가계부쓰기를 곧 그만둘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든다. 어쩔 수 없다. 2년 동안 정승 같이 놀고 복직해서 개같이 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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