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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Sep 28. 2022

두려워서 춤을 췄다.

살사를 배우면 돌아올 줄 알았다.

처음 살사바에 갔던 날이 기억난다. 바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지하로 계단을 내려가 입장료를 내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후끈한 열기와 함께 온몸이 진동하는 커다란 라틴음악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어두운 플로어에 원색의 조명들이 정신없이 비추고, 백 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을 뽐내며 춤에 열중하고 있었다. 묘한 불편함과 본능적인 흥겨움이 뒤범벅된 이질적인 감정들에 휩싸였다.




살사댄스를 배웠던 것은 춤바람이 난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7년을 만나 편안함이 권태가 되었을 무렵, 그는 느닷없이 살사 동호회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이성과 추는 사교춤이기에 달갑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취미가 없던 그였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과 표정은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내 삶의 일부였던 그를 놓아버리면 내 인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마지막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그를 이해해 보려 나도 살사를 배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와는 다른 동호회에 등록했다. 내성적인 내가 춤을 배운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비슷한 직군의 사람들과만 어울려왔지만, 그곳에는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의사, 자동차 딜러, 초등학교 선생, 헤어디자이너, 군인, 성우, 정육점 사장까지…… 흥부자였던 그들은 항상 연습실이 떠나갈 듯이 환영해 주었다. 화려한 그들처럼 나의 화장도 진해졌고, 편한 옷이 최고였던 나의 패션도 점점 과감해졌다.




살사바에 간 첫날, 구석에서 멋쩍게 음료수를 홀짝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처음으로 춤을 청했다. 긴장이 되어 마주 잡은 손은 덜덜 떨리고, 온몸의 근육이 뻣뻣해졌다. 눈은 마주치지도 못하고 고개는 자꾸만 아래로 떨구었다.


‘동작을 제대로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렇게 움직이면 창피하지 않을까?’


결국 4분간의 지옥을 맛보게 됐다. 발을 밟고, 박자를 놓치고, 동작은 계속 엇갈렸다. 상대방만 의식하다 보니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서도 나는 상대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춤이 늘었을 때도 내가 물 흐르듯 동작을 잘 받는다고 남자들은 좋아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즐기지 못했다. 오로지 상대가 어떤 동작을 할지 집중하며, 마치 무술의 합을 받아내듯 임했기에 교과서 같은 춤만 췄다.


어느 날은 누군가가 춤을 청했는데 처음부터 불길했다.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그 사람은 춤을 추는 동안 가슴과 엉덩이를 은근슬쩍 터치했다. 처음에는 실수겠지 했지만 몇 번 반복되니 의도적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당하고만 있었다. 그 남자는 징그럽고 비릿한 웃음을 남기고 춤을 마쳤다. 한마디도 따지지 못하고,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한동안 밤잠을 설쳤다.




그래서 내가 남자친구를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보호를 벗어나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의 연애는 다 타버린 초였다. 노력해도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하니 헤어질 용기가 생겼다. 다른 사람 인생의 들러리가 아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로 했다. ‘이별의 아픔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진부한 말은 어쩔 수 없는 정답이었다. 살사라는 진통제로 조금은 덜 고통스럽게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게 3 정도 즐기다 지금은 발길을 끊었다. 여전히 연한 화장에 수수한 옷을 입지만 예전의 나와는 엄연히 다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애정을 구걸하지 않는다. 떠나버린 사랑을 되찾으려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던 바보 같은 껍데기가 아닌, 나의 취향으로  시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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