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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Sep 15. 2022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침대

평화와 권태의 그 어디쯤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울 때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뗏목에 올라타는 것 같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정처 없이 흘러가다 보면 공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민거리나 성가신 일도 없었다. 평화를 넘어선 권태로운 일상이었다. 친구에게 카톡으로 푸념을 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아무 일 없음에 감사해."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당연한 이야기를 가르치듯 말하기에 기분이 상했다. 더 이상 말을 이어 가기 싫어 대화창을 닫아버렸다. 가족들 생각이 났다. 휴가를 내어 부모님이 있는 본가로 내려갔다. 설 이후에 처음이니 몇 달만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네 가족들이 다 같이 예전부터 자주 가던 중국요릿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원탁에 둘러앉아 오랜만에 북적대는 저녁을 먹었다. 부른 배만큼 마음이 충만해졌다. 코로나 탓에 이렇게 모인 것이 2년도 족히 넘은 것 같다. 그사이 갈 때마다 아기 의자를 요청해야 했던 조카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마음도, 배도 두둑한 식사를 하고 앞에 있는 호수를 산책했다. 조카들은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내려앉은 어둠에 산책로의 조명들이 수면 위에서 반짝거렸다. 그렇게 산책 종착점을 앞두었을 때쯤 사건이 터졌다.



앳된 남학생 둘이서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았다. 심장이 울릴 정도로 요란한 시동 소리를 내며 출발하는데 주변에 조카들이 보였다. 혹시나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어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 발밑은 살피지 못한 것이다. 인도의 경계석에서 발목을 삐끗하며 도로로 넘어지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거기서 끝날 줄 알았다. 그곳은 비탈길이었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순식간에 얼굴을 아스팔트 바닥에 처박았다.


나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새우처럼 웅크려 누웠다. 가족들은 내 주위에 둥그렇게 서서 괜찮냐고 묻기만 했다. 나는 잔뜩 날이 서서 일으켜달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일어나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자 조카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울을 보았다. 얼굴 여기저기 피가 나고 있었다. 코를 부딪친 충격이 그제야 몰려왔다. 화목했던 저녁은 나의 부주의로 일순간 깨져버렸다. 권태롭다 불평했다고 혼쭐이 나는 것 같았다. 주말 저녁이었기에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접수하는 동안 문 앞 의자에 앉아 잠깐 대기하고 있었다. 사고 충격으로 멍한 상태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침대가 밀려 나왔다. 침대 위에는 발을 제외하고 흰천으로 덮인 사람이 있었다. 찰나였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애써 바닥으로 시선을 피했다. 의사로 보이는 남자가 침대 옆에 서 있는 모자를 쓴 초췌한 여자에게 안치실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절차에 관한 짧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 차갑고 무거운 침대와 그녀가 밖으로 나갔고 곧이어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절망하는 그 상황에서 이기적인 나는 이것이 신이 보내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평화로운 일상을 권태롭다고 불평한 나에게 보낸 경고의 메시지라고 말이다.

‘평화란 이렇게 깨지기 쉬운 것이고, 죽음은 항상 너의 옆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응급실 안에서 나를 호출했다. CT와 엑스레이를 찍었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상처들을 처치 받은 뒤 3일 치 약을 받아 돌아왔다. 얼굴과 손바닥, 손가락에 난 상처들로 한동안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수시로 씻어야 하는 손도 제대로 씻을 수 없고, 샤워도, 화장도 어려웠다. 사람은 잃고 나서야만 소중함을 깨닫는 우매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가끔 부딪힌 코가 아리다. 그럴 때면 그날의 응급실이 떠오른다. 안치실로 향하던 침대의 그 사람은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간절했을까? 공허한 밤의 바다를 표류하던 뗏목은 그제야 목적 없는 항해를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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