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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Oct 02. 2022

옷장 속의 프라다

그 가방은 예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준 위자료 비슷한 것이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결혼식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30대 후반부터는 가뭄에 콩 나듯이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4년 만이었다. 참석을 앞두고 결혼식 교복이나 다름없는 남색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 이럴 때만 꺼내 드는 나의 유일한 명품 가방을 오랜만에 옷장 구석에서 꺼내 보았다. 오래전 선물 받은 아치형의 베이지색 프라다 숄더백이다. 그 가방은 예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준 위자료 비슷한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5번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끼려고 모셔둔 것은 아니었다. 상전을 모시고 다니는 듯 피곤했다. 지하철을 타도, 식당에 가도 혹시 가방이 찌그러질까, 티가 묻을까 신경이 쓰였다.


교제한 지 1년째 되던 날, 우리는 동대문 주변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타난 그는 개찰구를 통과하며 나를 보자마자 울먹거렸다. 커다란 기둥 뒤로 숨더니 다 큰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같이 울었다. 둘 다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던 때라 변변한 벌이조차 없었다. 첫 기념일이라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급하게 알바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입금이 늦어져 직접 회사까지 찾아가 돈을 받아오느라 늦었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그날 ‘반드시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동대문 쇼핑몰에서 6만원짜리 초록색 숄더백을 사주었다. 나는 그날의 기억이 너무 소중해서 손잡이 가죽이 다 헤지도록 그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그에게는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는지 기념일이나 중요한 계약을 하고 나면 가방을 선물해주곤 했다. 그의 일이 자리잡혀 갈수록 선물해주는 가방도 비싸져 갔다. 그리고 7주년이 되던 날, 백화점에 데려가 그 프라다 백을 사줬다. 그는 마치 게임의 마지막 퀘스트를 해낸 것처럼 홀가분 해했다.


다음 데이트에 그 가방을 들고 나갔다. 둘 다 뚜벅이였던 우리는 당산역에서 만났다. 그는 제대로 씻지도 않고 모자를 눌러쓴 채 나타났다. 들떠있던 나와는 달리 그는 내내 시큰둥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 있다가 도착한 지하철에 올라탔다. 주말이라 열차는 제법 붐볐고 그와 나는 창밖을 보며 나란히 섰다. 문이 닫히고 지하철이 움직이자 그는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양쪽 귀에 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황한 내가 말했다.


"시간이 아까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는 이어폰을 낀 채 핸드폰만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창밖만 바라봤다. 차창 밖 국회의사당이 눈물 속에서 흔들리며 뿌옇게 멀어졌다. 혼자 텅 빈 열차를 타고 가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아마 열차 속 사람들은 우리가 일행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다음 역에서 당장 내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옆에 있고 싶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영혼 없는 일정을 함께했다. 그와 함께한 시간 중 가장 비참한 날인 것은 확실했다. 그 가방은 그날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의 성공도, 차도, 명품 가방도 아니었다. 그저 예전처럼 손을 잡고 걷는 일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선물했던 가방처럼 값비싼 사람이 되었지만, 더 이상 그의 삶에 나란 존재는 없었다. 더군다나 나에게 그는 옷장 속의 프라다 백 같은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별 매리트가 없는, 매일 함께하기엔 부담스러운 그런 존재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가방을 꺼내 보니 예전처럼 부담스럽지도 애정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는 허망한 전리품 같은 그것을 다시 옷장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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