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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Oct 10. 2022

광고계의 샛별, 샛별을 보며 잠들다.

나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꽤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22살의 여름을 꼽을 것이다.


어느 , 잡지를 보다 어떤 대학생 광고 공모전 수상작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재치 있는 이미지와 카피에 중의적 의미를 담아 하나의 포스터로 만든 것이 재밌고 멋져 보였다. 나도   있을  같았다.

2학년 여름방학 시작과 함께 학과에 있던 광고 동아리에 들어갔다. 마침 신문사에서 개최하는  광고 공모전이 있었기에 팀을 꾸렸다. 주제에 대한 자료조사와 브레인스토밍, 스케치, 사진 촬영, 디자인 작업까지살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임해본  없었다. 몰입하고 있다 보면 전광석화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의 희열에 중독된  같았다. 여름방학은 금세 지나가 버리고 출력한 작품을 아기 다루듯 조심히, 그리고 튼튼하게 포장해 택배로 보내고 행운을 빌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공모전이었기에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핸드폰이 울렸다. ’02’ 시작하는 낯선 번호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기다리던 전화라는 것을!

쿵쾅거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동시에 동아리방에 있던 모두가 나를 쳐다보며 얼음이 되어 숨소리조차도 내지 않았다.

“네. 정말요? 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모두 나의 한마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상이래!!!”

동시에 요란스러운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그동안 나는 평범하고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하루아침에 우리 과의 스타가 된 것이다. 교수님들의 예쁨과 친구들의 시기 질투를 만끽했다. 당선된 신문사 인터뷰도 하고, 지역신문 기자가 찾아오고, 학교에서는 표창장과 장학금을 받았다.


대상에는 상금 이외에 부상이 있었다.  국제광고제 참관 기회였다. 졸지에 9 10일의 공짜 프랑스 여행을 가게  것이다. 수학여행  제주행 비행기를 타본 것이 유일했던 내가 프랑스에 간다니그것도 세계 3 광고제에! 분명  인생에 다시   황금기인 것이 분명했다.


다음  6,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광고회사 직원분들과 함께 프랑스 칸으로 향했다. 광고제를 참관하고 남는 시간에는 프로방스 여행도 하고, 마지막에는 파리에도 머물며 함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다른 분들은 회사 출장으로  것이었는데 그중 학생은 , 그리고 함께 팀을 이뤘던 오빠 단둘이 유일했다. 앳된 대학생 둘을 보고는 어떻게 오게  것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공모전에서 상을 받아서 오게 되었다고 하니  분이 광고계의 샛별들이네!”라며 한껏 띄워주셨다. 광고제 폐막을 기념하는  해변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며 그것이 나의 미래일 것이라 한껏 꿈에 부풀었다.


열흘의 단꿈을 꾸고 어깨가 으쓱해져 돌아온 나는 꾸준히 공모전에 참가했다. 진열장에는 트로피와 상장이 늘어갔다. 크고 작게 8개의 상을 받았다. 남들은 한 개도 힘든 것을 이렇게 이뤄낸 것 보면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도, 무엇을 잘해서 주목받아본 적도 없었기에 제대로 된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졸업이 가까워져 오며 선명해졌다. 공모전만 몰두하느라 그다음 스텝에 대해서는 갈필을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모전이 어떤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표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대기업 광고회사를 준비해야 할지, 제작 스튜디오를 가야 할지, 그래픽 디자이너를 해야 할지, 기획자가 되어야 할지 미궁 속이었다. 그런 고민을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댔다.

‘그저 공모전에 특화된 것 아닐까?’

출발을 하기도 전에 겁에 질려 자신을 그저 공모전에 특화된 사람으로 깎아내렸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의심만 커졌다. 두려움과 부담감에 길을 잃어버렸다. 기대하는 시선만큼 뭔가 대단한 사람이 돼야만 할 것 같았다. 노선을 정하기도 전에 무방비로 사회에 방출되었다.




방황으로 시간만 죽이다 급하게 선택한 첫 직장은 인쇄, 편집 디자인 회사였다. 그마저도 1년도 채우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백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라는 사람은 멈추면 그 관성을 깨기가 너무도 힘든 족속이었다. 두려움에 자책하며 선뜻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


딸내미의 미래에 한껏 기대했던 부모님의 걱정도 깊어졌다. 뭐라도 될 줄 알았던 자식이 밖엔 나가지도 않고 무위도식하며 컴퓨터로 새벽까지 게임이나 하고 있다니 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서 마우스 클릭 소리만 들렸다. 자다 깨서 잠깐 화장실에 가던 엄마가 말한다.

“지금까지 뭐 하고 있어! 얼른 자.”

억지로 몸을 누였지만, 도저히 잠 비슷한 것도 오질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시름도 깊어진다. 1시…3시…5시… 점점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커튼 뒤로 푸른 새벽이 와버렸다. 그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오후가 되어 일어나 멍하게 대낮의 아침을 맞이한다. 밥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시 밤이 된다. 또 의미 없는 하루가 가버렸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라고 했다. 허송세월 보내며 맘껏 과소비했으니 아마 죽으면 영화 ‘신과 함께’에서 본 나태 지옥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정작 실질적으로 필요한 어떤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업 준비에 필요한 포트폴리오라던가 자기소개서 같은 것 말이다. 하려고 하면 할 것투성이였다. 엄두가 안 났다. 나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누가 내 인생이라도 대신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패잔병처럼 초라했다. 지금 돌아보면 결코 늦지 않았는데 그땐 알지 못했다. 여러 번의 공백 끝에 현재는 UI/UX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이직 때문에 면접을  때면 받는 질문이 있다.

“왜 광고 쪽으로 안 가셨어요?”

나는 정곡을 찔린 듯 횡설수설 답을 했다.

제가 게으른 겁쟁이여서요.”라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의 영광의 트로피들은 아무 쓸모 없이 빛을 바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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