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기린 Oct 17. 2022

포토샵 하는 회사원

연봉과 워라밸을 찾아 세상과 타협했지만 여전히 지키고 싶은 이름

아침 8. 오로지 편안함에 초점을 맞춘, 하지만 회사 분위기를 흐리지는 않을 정도의 옷차림을 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집을 나선다.  뼘의 사적 공간도 허락해주지 않는 9호선을 타고, 당산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을 한다. 시청역에 내리면 출구의 수많은 계단을 오를 차례다.  계단을 오르는 좀비  같은 출근 인파의 회사원   . 업계에서는  직업을 UI/UX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만, 남들이 알기 쉽게 웹디자이너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스스로 떳떳하게 ‘디자이너라고 말할  있을지 모르겠다. 포토샵 하는 회사원이라면 모를까


디자인이라는 것이 그렇다. 답이 없는 일이기에 마감은 있지만 완성이라는 것이 없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멋진 모습의 디자이너와는 다르게 현실은 하루하루가 두렵기만 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지나 마감일엔 반드시 결과물이라는 성에 도착해야만 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이 엉뚱한 곳이라면… 상상하기도 싫다. 첫 2, 3년은 감당할 수 없는 막막함에 회사 화장실에서 소리죽여 운 적도 셀 수없이 많다. 나에게 디자인은 너무도 신성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작은 부탁에도 차마 응하지 못했다. 지인이 연 가게의 메뉴판이라던가, 가족 행사에 약도를 만드는 것조차도 말이다. 나에게는 일의 경중을 떠나 그 고통의 무게가 다르지 않았다. 항상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괴롭혔다.




첫 직장은 내가 선망했던 회사들과는 거리가 먼 인쇄광고와 편집물을 다루는 작은 그래픽 디자인 회사였다. 면접을 보다 갑자기 본인 방으로 사라진 대표는 내 사주를 찾아보고 오던 이상한 면접이었다. 하지만 규모에 비해 이름있는 회사의 작업물들을 다루고 있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대표와 사장이 남매 관계인 가족회사였다. 얼마 전 대대적인 물갈이가 되어 다른 직원들 역시 입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긍정 회로를 돌리며 ‘다들 새로 들어왔으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그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출근 첫날부터 오후 9시까지 야근을 했다. 며칠 후 조금 더 규모가 있는 다른 회사에서도 면접 제의 연락이 왔었지만, 복잡해지는 것이 싫어 거절했다.


동료들은 일도 열심히 하고 모난 구석 없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금방 드러났다. 대표와 사장은 남매지간이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업무에 대해 전혀 공유하지 않았다.  때문에 전혀 일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사장은 따온 일을 바로 주지 않고 마감일이 급박해졌을  알려주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를테면 월요일에 인쇄되어야  카탈로그와 포스터 등을 금요일 오후 5시에 이야기해준 끔찍한 사건 같은 것들 말이다. 평일 저녁도, 주말도 사라져 버렸다. 100만원이 겨우 넘는 월급을 받으려   전체를 저당 잡힌 듯했다.


대표는 대학원과 골프 모임 등에서 알게  인맥을 통해 돈이 되는 일이면  가져왔다. 전문성이 필요한 증권회사 웹사이트 리뉴얼, 패션쇼까지 가져왔다. 사수도 없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안개 속을 더듬거리며 다가오는 마감일을 맞추려 몸과 마음이 타들어 갔다. 실수 없이 끝나면 본전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아무리 확인해도 오류가 있을  있다. 그러면 인쇄물을 다시 뽑거나 스티커를 이는 수정 작업을 해야 한다. 덩달아 회사에 금전적 손실도 가져온다. 한번 인쇄사고를  이후로 납품을 끝내고도 항상 불안에 떨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잘못된 부분이 발견돼 연락이 오는 것은 아닐까 하며 말이다.


  문제는 일을 계속해도 전혀 내가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얼마 갖고 있지도 않은 밑천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소모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에겐 ‘디자이너 겉멋 같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업무 외에도 거래처 담당자와 매달 만나 해야 하는  싸움, 오는 손님들에게 커피 내주기, 회사통장 정리와 대표의 자동차 범칙금을 내러 은행에 가는 것도 나의 업무  하나였다.


중요한 타이밍은 모두 놓쳐버리고 시간과 마음에 쫓겨 어쩔 수 없는 선택만을 하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일을 하니 급여는 받을 수 있었지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자존감과 디자인에 대한 열정.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내적 자산마저 잃어버리고 정말로 껍데기뿐인 인간이 되고 말았다.


 직장에서 얻은 실망감 때문에 나는 디자인에 어떤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구석 방황만 반복하다 보니 결국 다시 디자인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변에 친구들도 웹디자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도 하는데 나라고  하겠어?’ 하며 뛰어들었다. 대신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싶었다. 실력 좋기로 소문난 디자인 학원을 찾아가 이론과 스킬을 다시 공부하고 포트폴리오 준비에 매진했다.


드디어 원하던 메이저  에이전시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이트가 오픈할 때까지  개월 동안 머릿속은 고민으로 꽉차 있었다. 어떤 디자인을 해야할지, 일정은 맞출 수 있을지… 계속되는 주말 출근과 새벽 퇴근은 당연했다. 누구나  아는 대기업 사이트를 만들었다는 보람은  수고에 비해 너무도 잠시뿐이었다. 커리어를 담보로  적은 월급은 나의 열정을 차갑게 식게 했다. 에이전시에서 열정페이를 감내하는 것은 경력을 만들어 포털이나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한 업계의 암묵적인 수련 과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얻은 경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금전적인 보상과 워라밸에 너무도 목말라 있었다. 매일 가벼운 마음으로 정신적인 퇴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운영 디자이너로의 이직이었다.




이직을 하고도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금융사에서 홈페이지와 앱에 게재될 이벤트나 신규페이지 등을 디자인하거나, 기존 페이지들을 유지보수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지금 하는 일이 어떤 것 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신속, 정확해야 하고 디자인 가이드와 기획서 사이에서 발휘해야 하는 융통성 또한 필요하다. 이 분야에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수정작업을 할 때면 디자이너가 아닌 ‘포토샵 하는 회사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의 뿌리 깊은 자존감이었던 디자이너라는 이름. 박봉에 야근을 해도, 열정이라는 것으로 용서가 되었던 이름. 하지만 되려 그것에 지쳐버려 자존감은 흐려진 채 조금 더 높은 연봉과 워라밸을 찾아 세상과 타협했지만 여전히 지키고 싶은 이름.

디자이너.


이전 06화 광고계의 샛별, 샛별을 보며 잠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