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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Sep 22. 2022

내가 정상인이라는 알리바이가 하나도 없었다.

사십춘기

2021년 10월, 슬슬 찬바람이 시작될 때쯤, 나는 다시 먹고살 걱정에 빠졌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1년 넘게 해오던 프로젝트가 끝나자 무소득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근근이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는데 다시 다음 달 월세와 카드값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니 지난 모든 삶이 후회스러웠다. 심란했다. 서른아홉. 30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마흔 이후의 삶을 그려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곧 현실이 된다. ​삶의 낙이라고는 가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뿐이다.


“조금 있으면 마흔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막말로 내가 집이 있어, 차가 있어, 진득하니 직장을 다닌 것도 아니고, 결혼도 안 했고… 그렇다고 연애라도 많이 해봤나? 그것도 아니지. 사치를 부려 본 적도 없고… 난 그저 대충 살기 싫어서 신중하게 고민했던 건데 방황만 한 것 같아. 돈, 사랑, 커리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앞으로 뭐가 더 나아지긴 할까?”


토요일 오후의 커피숍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며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정상인이라는 알리바이가 하나도 없었다.

혹여 결혼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공허함과 소외감에 시달렸다. 남편, 시댁, 부동산, 아이 학군과 학원 이야기… 어디에도 함께 나눌 대화 주제가 없었다. 의미 없는 날씨,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나 다시 꺼내는 것 말고는 말이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친구들은 다 남 이야기뿐이었다.


청약이 어떻고, 아파트 전세가가 어떻고 하는 대화를 나누고 내가 돌아온 곳은 5평짜리 원룸 오피스텔. 풀옵션인 내 방에는 맥가이버 칼처럼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지만 숨이 막혔다. 실용성만 있고 여유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공간이 마치 내 삶 같았다.



 

어릴 적 막연히 생각한 마흔은 이미 완성형 인생이었다. 결혼하고, 자식 낳고, 집도 있고, 디자인 회사도 차린 그런 미래 말이다. 적어도 다음 달 카드값이 빠져나갈 마이너스 통장의 잔고를 따져보며 5평 원룸에 혼자 누워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렇게 되어버린걸. 이렇게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사춘기’도 없이 십 대를 보낸 내게 ‘사십춘기’가 찾아왔다. 세상의 모든 것이 뒤틀려 보이고, 불만족 투성이었다. 밤이 되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무수한 선택의 순간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며 괴롭혔다.

‘그때 그 대학을 선택했다면 내 삶이 아예 달랐을지 몰라’

‘그때 그 사람과 더 빨리 헤어졌더라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까?’

‘그때 그 회사에 갔으면 지금 백수가 되지 않았겠지?’

불멸의 밤이 시작되었다. 지난날의 후회 속에서 허우적대다 자기 연민에 뒤범벅된 못난 내가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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