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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Apr 23. 2023

월급루팡의 하루


종일 작은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목덜미가 아프고, 눈은 사시가 될 것 같다. 지난주엔 업무가 한 건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한 업무였다. 몇 달 동안 이어졌던 대형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니 한가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일도 안 하고 돈 버는 것이 얼마나 좋냐고 하겠지만 그렇게 달콤하지만은 않다.




9시_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한다. 아침으로 요구르트를 하나 먹고, 출근하면서 못다 본 유튜브 좀 보다가 심심해지면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한 시간쯤 있으면 점심시간. 메뉴는 곰탕, 순댓국, 짬뽕, 순두부찌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점심을 해결한 후, 산책하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1시_오후 업무 시작. 화면보호기가 돌아가기 전에 한 번씩 마우스를 건드려 주어야 한다. 틈틈이 메일함도 흘깃 확인한다. 

4시_더 이상 볼 유튜브 영상도 없다. 눈알을 움직일 때마다 시신경이 녹슨 철사처럼 뻐걱거리는 것 같다. 다리도 붓는다. 회사 주변을 걷고 들어온다. 오자마자 메일을 확인한다. 역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5시_이제는 퇴근 준비시간이나 다름없다. 화장실 다녀오고, 오늘 쌓인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갔다 하다 보면 6시. 시계 숫자가 06:00로 바뀌는 동시에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그렇게 벌써 2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다. 하지만 나에게 잘못이 없다. 일이 없어서 안 한 것뿐이다.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가 내뿜는 열로 한증막같이 답답해진 창문도 없는 사무실. ‘저러다가 하마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연거푸 하품을 내뱉는 동료.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모니터와 모니터 사이 하얀 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작년에는 이렇게 죽이는 시간이 아까워 개인적인 공부를 한다든지, 글을 쓰든지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의미 없는 시간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나도 다른 동료들처럼 그저 퇴근 시간이나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입사할 때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로 계약했기 때문에 파견지인 이곳이 업무 계약이 끝나면 나도 계약이 끝나버린다. 그러면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퇴보하고 있다가 다른 곳에 갈 수 있을까? 업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고이다 못해 썩어가는 상황에 자존감마저 떨어져 가고 있다. 이제 이직을 하게 되면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관리자급에 가야 할 텐데 요즘 날고 기는 젊은 사원들 사이에서 확신 있게 업무지시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든다.




부모님께서는 자꾸만 정규직으로 전환하길 바라신다. 하지만 그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회사에서는 환영하겠지만 나에게는 별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월급 자체가 너무 많이 차이가 난다. 기존에 받던 돈이 있는데 급여가 줄어든다는 것은 큰 타격이다. 정규직의 장점은 일자리 안정성과 직장인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두 가지. 


부모님이 정규직을 하라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집.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는데 집은 사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고 대출받아서 집을 샀다 치자. 나는 그날부터 너무 불행할 것 같다. 어마어마한 빚과 이자를 내기 위해 몇십 년을 묶여 일해야 한다. 월급이 줄어들었으니 더 오래오래 갚아야 할 것 아닌가? '내 집 마련을 해야만 한다'는 세뇌를 통해서 사람들을 고분고분 오래 일하게 하려는 세상의 수작질 아닐까?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은 모른다. 중소기업 IT 에이전시 디자이너는 평생직장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한곳에 오래 몸담는 것이 그리 이로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나도 고민이다. 또 멈춰서서 있는 돈 탕진하면서 허송세월할까 봐 두렵다. 30대를 보내며 알게 된 나는 그리 조직 생활에 맞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파견직 프리랜서이다. 그래야만 그만두지 않고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업무평가, 인사평가, 분기마다 돌아오는 면담 따위 안 해도 돼서 너무 살만하다. 꼴사나운 정치질에서도 자유의 몸이다. 업무만 하면 된다. 여기저기 프로젝트에 투입되며 골머리 썩지 않아도 된다. 프리랜서를 하면서 월급이 많아지니 돈이 금방금방 모인다. 예전에는 저축해도 티도 안 나더니 지금은 쑥쑥 숫자가 올라간다. 결국 내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 따지나 저리 따지나 조삼모사인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 시간에 공부라도 해야지! 내일은 백팩을 메고 힘차게 집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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