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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Apr 30. 2023

6살 꼬마의 반항


몇 년 전, 음식 준비로 분주하던 추석을 앞둔 오후였다. 아빠와 작은 아빠께서는 거실에서 밤을 까고 계셨고, 작은엄마와 나는 부엌 바닥에 전기 팬을 놓고 전을 부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너는 기억 안 나지? 네가 어릴 때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그래서 너희 아빠가 엄청 충격받았다고 명절 때마다 그 이야기하시던데 오늘도 하시겠다야~"

"제가요? 제가 그런 말을 했대요?"


가스레인지 앞에서 음식을 하고 계시던 엄마가 몇 마디 보태셨다. 내가 어떤 집에 놀러 갔다 오더니 우리 집엔 소파도 없고, 피아노도 없고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해서 아빠가 충격을 받았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 듯했다. 흐릿했지만 어느 부분은 또렷했다.



 

6살 때, 피아노 학원이 끝나고 같은 학원에 다니던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 언니네 집엔 피아노가 있다고 했다. 우리 집에 없는 넓은 거실에 소파가 있었고, 언니 방에 듣던 대로 피아노가 있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너무 늦게 집에 돌아오는 바람에 엄마에게 혼이 났던...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아빠는 직업 군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농가에서 나고 자라셨다. 그나마 군인이라는 직업 덕에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맏이라는 타이틀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엄마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일화가 있다. 내가 더 어렸을 때, 양옥집 2층에 세 들어 살았는데 우리 집엔 전화가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른 아침부터 1층 주인집에 전화를 걸어 빚 갚아 달라는 이야기를 전달했다고 한다. 월급으로 네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했을 텐데 엄마는 적금까지 열심히 부으셨다. 그러나 만기가 되던 날, 할아버지께 연락이 와서 은행에서 받은 돈 봉투 그대로 갖다줬다고 한다. 당시 재수를 하고 있던 삼촌 뒷바라지까지 했으니 그 부담감을 짐작하기도 힘들다. 그 와중에 아빠는 주말마다 시골집에 내려가 농사까지 도왔다. 효자인 아빠는 군말 없이 다 견디셨다. 그러다 드디어 방 2칸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신 것 보면 그나마 조금 형편이 나아지셨었나 보다.


“그 언니네는 소파도 있고, 피아노도 있던데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아마 이렇게 말했으려나? 집에 늦게 들어와 꾸중을 들은 6살짜리 딸이 날린 팩트 폭행에 아빠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필 그날 저녁, 또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아빠는 처음으로 할아버지께 화를 내셨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본 아빠의 화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의 다음 기억은 백화점이다. ‘다이나톤’이라는 브랜드의 전자 키보드를 사주셨다. 건반이 피아노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그 키보드를 쳤던 기억이 난다.




지난가을, 조카가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됐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집에 있는 장난감 건반으로 연주한다니 재능이 있는가 보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조르기에 보내줬다고 한다. 소식을 듣자마자 부모님께서는 조카에게 멋진 하얀 디지털 피아노를 사주셨다. 아빠는 아마 손녀에게 전자 키보드가 아닌 번듯한 피아노를 사주며 이제야 마음의 짐을 덜어놓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이쯤에서 반전의 사실을 말하고 싶다. 단 한 번도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고. 그저 꾸중을 들은 6살짜리 꼬마의 치기 어린 반항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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