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안에서

by 나무기린

요즘 잠을 푹 자지 못한다. 내용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불안하고 무서운 기분의 어지러운 꿈을 꾼다. 게다가 새벽 3, 4시에 꼭 한 번씩 잠에서 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흉흉한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뉴스를 보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다.


그 사건들은 불특정 다수를 향하고 있고 일상의 너무도 대중적인 곳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 퇴근하는 지하철에서는 어떤 남자가 무슨 일 때문인지 “아!” 하며 큰소리로 짜증을 냈는데 그 객차 안의 많은 사람들이 움찔하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이젠 지나가는 사람이 무언가를 손에 들고 가는 것만 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여겨본다.


점심시간에 동료와 회사 주변을 산책하는데 혹시나 갑자기 칼부림 사건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면 이쪽 방면으로 뛰어와서 숨자고 얘기를 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몇 번 길에서 흰색 차가 쫓아온 적('나를 쫓아오던 차' 글 참고)이 있어서 인도 쪽에 가까이 서 있는 차만 봐도 경계하게 되었는데 이젠 지하철, 인도, 쇼핑몰에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생각해 보면 사무실과 집을 제외한 모든 곳이 불안한 공간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불안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 갈까?


나쁜 경험을 한 곳이 일상의 공간일 때 그 일은 좀처럼 잊기 힘들다. 여름, 장우산을 가진 남자, 엘리베이터. 그 일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동 재생되어 불안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2008년 여름이었다. 친구가 이사를 해서 집들이 삼아 놀러 갔다. 친구의 집은 신촌역과 공덕역 사이 길가에 위치한 원룸이었다. 친구와 신촌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봤더니 조금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12시~1시쯤이었던가? 우리 둘 다 여자긴 해도 대로 길에 둘이 걸어가는 것이니 무섭지는 않았다.


건물 입구에 도착했을 때(1층에 번호 키가 없는 현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웬 남자가 문 옆에 서 있었다. 165cm 정도의 키, 조금 마른 체격의 40대 중반의 아저씨. 남색 카라티를 입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머리에 가로로 긴 프레임의 흔한 디자인의 검은 금속 테 안경을 썼고 한 손엔 골반까지 올 정도의 큰 장우산을 가지고 있었다. 공무원이거나 회사원이라면 차장 직급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늦은 시간에 건물 앞에 서 있는 것이 수상쩍었다.


나와 친구는 현관을 들어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 남자는 현관 옆에 선 채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올까 말까 약간 주춤거렸다.


‘제발 오지마… 제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쯤, 그 남자는 어느새 우리 뒤에 서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둘이잖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제발 그 남자보다 친구가 먼저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길 바랐지만, 친구는 타자마자 버튼을 눌러버렸다.

‘11층’


친구가 11층을 누르자마자 그 남자는 바로 아래층인 10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왼쪽 문 쪽에 내가 서 있었고 내 뒤쪽엔 친구. 그 옆에 그 남자가 섰다.


스르륵 문이 닫히고, 나는 문 위에 보이는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2... 3... 4...


시간이 늘어진 것처럼 더디게만 흘러갔다.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서 분주함이 느껴졌다. 옆눈으로 그 남자를 흘깃 보니 바지 지퍼를 내리고 한 손을 격하게 반복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작고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은 작동 기계음과 분주한 그놈의 손놀림 소리만 가득했다.


5... 6... 7...


섯부르게 행동했다가는 그 커다란 우산으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스쳤다.


8... 9... 10.


엘리베이터는 그 남자가 눌렀던 10층에 도착했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제발 내려. 제발…’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그놈은 내리지도 않고 행위에 취해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열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다급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놈은 그제야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부딪혀 가며 성급하게 내렸다.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는지 머리까지 둥둥 울렸다. 그놈이 내릴 때 보니 엘리베이터 앞엔 바로 계단이 있었다. 우리가 한 층을 올라가는 사이 계단으로 올라와 11층에서 우리를 기다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남자친구와 통화를 이어갔다. 그 몇초의 시간에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들었다.


나와 친구는 11층에 도착하자마자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이 지나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친구가 그 집에 이사 들어간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알고 보니 그 건물엔 주차장 쪽에만 CCTV가 있고 현관과 엘리베이터에는 없다고 했다. 아마 그것을 알고 그 건물을 선택했을 것이다. 건물 앞에서 타겟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자긴 한데 2명이 들어오니 그놈도 같이 탈까 말까 주춤거린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외모나 행색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다.




여전히 장우산을 가진 남자를 보면 문뜩 떠오르고, 집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한다. 누군가 같이 타게 될 땐 무조건 마지막에 타고, 먼저 층수를 누르지도 않는다. 싸한 느낌이 드는 사람과 단둘이 탔는데 같은 층을 가는 것이라면 좀 난감하다. 그럴 땐 2, 3층에 내려 다음 엘리베이터를 탄다. 조심해서 나쁠 일 없지 않은가.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촉각이 곤두선다.


아마 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일은 각인된 채로 불쑥 떠오를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불안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