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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Oct 03. 2023

사람이 성가시다.

참으로 긴 여름이었다. 5월부터 시작된 무더위가 9월까지 이어져 낮에 산책을 하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런데 이제는 긴팔 옷을 입어야 한다. 매년 겪는 여름인데도 매번 처음 같은지 모르겠다.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 것일까? 또 고질병이 돋는다. 마음이 적적해져 온다. 음… 사실은 올봄부터 시작된 고민인 것 같다. 사람이 성가시다.




사람들과 부대껴 지내는 것이 힘겨워졌다. 말이 안 통하는 동료와 점심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예전엔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떨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뭔가 모를 찝찝함이 남아 한동안 나를 괴롭게 한다.


고향에 내려가 며칠 있다 오면 그래도 마음이 충만해져서 왔었는데 이젠 아니다. 복닥복닥거리며 서로 불만을 표현하고 정신없이 있는 것도 아주 기가 빨렸다. 가면 아빠와 시댁 불만을 토해내는 엄마, 모이면 자기가 안 나서면 돌아가지 않는 줄 아는 땍땍거리는 동생. 잠자리도 불편해서 하룻밤도 편하게 자지 못해 컨디션이 무너져서 돌아왔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안 샀으면 어쩔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나마 이어폰이 나를 세상에서 지켜주고 있다. 출퇴근 지하철의 소음, 사무실에 듣기 싫은 소리로부터...


그런 나에게 이번 추석은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성가셨다. 억지 미소 짓고 있느니 그냥 안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추석날 오후에 집으로 내려갔다. 먹기 싫다는 술을 계속 강요하는 것도 싫고, 명절마다 꺼내는 가물가물한 옛날이야기들을 들추어 깔깔대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지랄맞은 동생이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오바떠는 것도 보기 싫고, 명절 모임이 끝나고 나서 또 전날 있었던 일로 아빠를 들들 볶는 엄마 잔소리도 듣기 싫었다. 이번 연휴는 자그마치 6일. 별다른 계획도 없었던 나에게는 추석날 내려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회사가 일찍 끝나 퇴근하면서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남들이 고속도로 위에서 길 막혀가며 집에 가는 동안 혼자 여유롭게 영화관에 앉아있는 나. 해방감을 느꼈다. 연휴 첫날, 미용실에 갔다. 그동안 자란 뿌리 염색을 하고, 덥수룩해진 머리도 손질하니 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원래대로 집에 내려갔으면 지금쯤 교자상 앞에 앉아서 기 빨리고 있었겠다 생각하니 그 순간이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혼자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추석 당일 집으로 내려갔다. 친척들은 이미 오전에 다 돌아갔다고 했다. 아빠는 어제의 즐거운 여운이 가시지 않아 보였다. 모여서 옛날얘기를 했는데 아마 네가 있었으면 기억을 잘해서 아마 더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전날 안가길 천만다행이구나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족, 친구,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내가 쓸데없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스트레스받으면서까지 할 필요 없는데 말이다. 인간관계는 어디까지가 인간관계이고, 친구는 어디까지가 친구일까 하는 본질적인 고민도 하게 되었다.


연락도 그렇다. 나도 먼저 연락을 잘하지는 않고 받는 것에 익숙한 편이지만 그래도 몇몇 지인에겐 먼저 연락을 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렇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과연 먼저 연락을 할까?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끊어질 인연이라는 뜻이었다.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았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을 안 하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연락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쌍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에 주도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반대로, 내가 연락을 받기만 하는 관계에서 연락을 해온 그 사람에게 관계에 주도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그냥 간혹 온 연락에 친절히 응대를 해줄 뿐이었다.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나? 아니면 너무 매정한 걸까?




인간에 대해 지치기만 하는지 '왜?'라는 질문을 거듭하니 결론에 도달한 것은 내가 에너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긴 여름을 지나며 나는 체력이 많이 고갈되었다. 그러니 작은 성가심도 담아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여름이 지나 가을, 겨울로 넘어갈 때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다. 한 것도 없이 피곤하고, 계속 미세한 어지럽기까지 하다. 잠잠하던 만성위염이 다시 시작됐고,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어도 피곤해 미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흔이 넘으니, 몸이 고장 난 배터리가 되어 성능이 떨어진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은 에너지를 쓰지 않을 뿐이지 충전은 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비로소 충전이 된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


요즘은 뭘 먹어도 맛이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나마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받은 공감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일. 그뿐… 매주 그만큼만 충전을 해, 그만큼만 버티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것 또한 엄청 신나는 일도 아니다. 또다시 시작된 노잼시기. 일단 에너지부터 충전해 보기로 하자. 그럼, 그 뒤는 어떻게든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해본다. 그러면 마음에 여유가 생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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