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듣고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탁자에 내려놓은 맥주병이 비틀대다 의자 모서리에 떨어져 그녀의 손가락을 덮친 것이다. 그녀는 급히 팀원들의 부축을 받아 응급실로 향했고 흥겹던 회식자리는 차갑게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그녀는 손가락에 쇠로 된 보조기구를 달고 출근했다. 원래는 바늘로 꿰매야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에 흉터를 남기고 싶지 않으셨는지 손가락을 깁스하듯 고정기를 끼워놓으셨다. 난 그녀에게 미안하다 연거푸 사과를 했고 그녀는 나중에 밥이나 사라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달랬다.
그날부터 난 매일 아침 그녀의 손가락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고정기와 붕대로 숨겨진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난 매일 그녀의 자리를 찾아와 손가락 상태를 확인하고 커피나 쿠키 같은 것들을 건네며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처음에는 괜찮다며 손가락을 숨기던 그녀는 점차 내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아픈 시늉을 하며 가방을 들어달라는 부탁도 하곤 했다.
“이런 커피 말고 나 진짜 부탁하나 제대로 들어줄래요?”
어느 날 그녀가 퇴근시간에 내 자리에 찾아와 말했다. 손가락을 감싸던 보조기구를 풀고 붕대만 하고 다니던 때였다. 난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줄 마음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부탁은 당황스러웠지만 난 잠시 고민하다가 들어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러 그녀와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그녀의 노트북 가방을 내손에 든 채로.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레몬향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난 미용실에서 샴푸 서비스를 받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머리를 구석구석 감겨주었다.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다친 그녀는 매일 아침 머리를 제대로 감지 못해 답답했다고 했다.
“뭘요, 나 때문에 그런 건데 내가 미안하죠”
그녀의 집에서 그녀 머리를 감겨준 그날. 내가 처음으로 남의 집에서 외박을 한 그날. 그날은 이후 그녀와 나 사이의 끝없는 논쟁이 시작된 날이 되었다.
“과연 누가 먼저 꼬리를 쳤는가?”
1번. 매일같이 그녀의 손가락을 확인하고 먹을 것을 두고 간 나
2번. 머리를 시원하게 감겨달라는 부탁을 한 그녀
3번. 머리만 감겨주면 되는데 갑자기 어깨 마사지를 해주겠다던 나
4번. 옷이 젖었다며 방문도 닫지 않은 채 옷을 갈아입던 그녀
5번. 이미 지난주에 상처가 완벽히 아물었지만 붕대를 감고 있었던 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