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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17. 2022

갑오징어의 서핑보드

오징어계의 갑이라 불리는 갑오징어는 어떻게 갑이 되었을까?

갑오징어에게는 비장의 무기, '서핑보드'가 있기 때문이다.


새우잡이 배 선장님의 연락을 받고 새벽에 달려간 배에는 갑오징어가 가득했다. 모조리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욕심을 버리고 5킬로만 사 가지고 왔다. 욕심을 버렸다고 했지만 5킬로의 갑오징어 양은 상당했다. 사 온 갑오징어를 싱크대에 풀어놓고 보니 나의 욕심 가득함이 묻어난 갑오징어 봉다리는 먹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욕심꾸러기에게 먹물이라도 퍼붓고 싶었나보다. 갑오징어 5킬로를 손질하다 갑오징어 손절할 뻔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유튜브에서는 어떻게 손을 넣어 뒤집어 내장을 빼라고 하는데, 나는 못 따라 하겠다. 그냥 내 식대로 몸통을 가위로 가르고 내장을 빼내고 껍질을 벗겼다. 갑오징어 손질이 일반 오징어보다 더 어려운 이유는 바로 '갑' 때문이다. 녀석들이 다 서핑보드 같이 생긴 '갑'을 하나씩 몸에 차고 있으니 손질이 영 성가시다.


빼낸 갑들을 모아 놓으니 어느 바닷가에 널린 서핑보드 같다. 이 갑오징어 녀석들 꽤나 멋있는 녀석들이란 생각이 든다. 맛만 좋은 게 아니라 놀 줄 아는 녀석들이다. 등에는 서핑보드를 차고는 언제는 파도가 오면 파도에 올라탈 줄 아는,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바다 위를 서핑보드를 타며 즐길 줄 아는 '노는 놈'들이었다.




호주에선 공부만 잘하고 놀 줄 모르는 아이를 '너드(nerd)'라고 놀려 부르는 말이 있다. '공부'는 수 백만 가지의 사람의 재능 중 하나 일 뿐이지, 대단한 재능이라고 인정해 주진 않는다. 오히려 공부만 잘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다. 사회성도 좋아야 하고, 게임도 잘해야 하고, 잘 놀 줄 알아야 인정받는다.


'잘 논다'는 건 인생을 즐기며 살 줄 안다는 의미이다. 사는데 열심과 열정도 필요하지만 즐거움과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갑오징어처럼 서핑보드 하나쯤은 차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언제든 파도에 올라타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너드’같다.


갑오징어에게서 갑을 떼어 내면 그 자리는 비어 있다. 갑을 채운 자리는 오롯이 갑을 위한 자리였다. 통통하고 맛있는 갑오징어 살을 비워야만 그 자리에 서핑보드를 장착할 수 있다. 갑오징어가 갑이 없이 맛있는 살로만 채워져 있었으면 잡아먹는 포식자들에게는 좋았을지 모르나, 오징어계의 갑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그 자리는 온전히 서핑보드의 자리로만 비워두고 있었기 때문에 갑오징어는 '갑(甲)’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다는 건 오만한 착각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거스르는 교만이다. 잘 놀기 위해서는 그 시간을 온전히 비워두어야 한다. 너무 일에 몰두해 에너지를 다 쏟았다면 노는 데 써야 할 에너지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놀고 싶어도 에너지가 딸려 놀 수 없다.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중복 예약이 불가능하다. 더블 부킹 하면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서핑보드는 어떤 것일까? 언제라도 나를 훌쩍 바다에 던지게 해 줄 나의 서핑보드는 무엇일까? 비록 그 시간에 무언가 대단한 걸 이룰 수도 없고, 금전적인 이익이 없다할 지라도, 나에게만은 온전한 즐거움을 갖게 해 줄 서핑보드 하나 갖고 있어야 멋있는 사람이다.


내가 사는 옆 동네 이름은 '서퍼스 페러다이스(surfer's paradise)'다. 그야말로 서퍼들의 낙원인 곳이다. 항상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닷가 동네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서퍼들이 자기만의 서핑보드로 신나게 파도를 타고 있다. 우연히 만난 어느 서퍼에게 서핑보드를 몇 개나 가지고 있냐고 물었을 때, 자신은 전문 서퍼라 4개의 서핑보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스탠다드 보드, 또 하나는 파도가 약할 때 타는 보드, 또 하나는 파도가 아주 셀 때 타는 보드 마지막 하나는 스탠다드 보드 백업용이라고 했다.


난 전문 서퍼는 아니지만, 인생에서는 적어도 네 개의 서핑보드를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탠다드용, 잔잔한 인생용, 거친 인생용, 백업용까지. 인생의 파도를 즐기는 전문 서퍼가 되고 싶다. 아직 인생초보라 파도를 즐기긴 커녕 파도에 허욱적거리기가 일쑤이지만, 서핑보드 위에서 자신을 세우고 파도를 신나게 탈 수 있는 서퍼가 되고 싶다.


갑오징어는 서핑보드 때문에 갑이 되었다.

나도  인생의 갑이 되고 싶다. 서핑보드를 타며 파도를 즐기는 갑오징어처럼.


오늘의 희열카드 - 갑오징어 갑 카드
<사진 출처: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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