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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Sep 21. 2022

흔적

내일은 공휴일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로 호주는 갑작스레 9월 22일을 공휴일로 만들었다. 일 년에 얼마 되지 않던 공휴일이 하루 늘었다.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소식에 슬프다기보다 공휴일이 하루 늘어나 좋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삶의 흔적을 호주 달력에 빨간 날로 남겼다.


내일은 공휴일이라 마음도 즐겁고, 봄방학이라 뒹굴 데는 둘째는 뭐 재밌는 일 없냐며 졸라대고, 남편도 마침 쉬는 날이라 아침 일찍 셋이 바닷가를 갔다. 바다 위 하늘은 누가 하늘을 비질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비질 자국이 새털구름으로 남아있다. 하늘은 깨끗해진  마음의 흔적을 구름으로 그렇게 남겨두었다.

아들과 남편은 피피(pipi) 조개를 잡겠다며 모래 위에서 발로 트위스트를 한다. 멀리서 보면 누가 바닷가에서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지나가던 사람이 와서는

'너희들 춤추고 있는 줄 알았어. 뭐 하는 거야?'

하고 물어본다.

피피 조개를 줍는다고 하면 신기해 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밭 위에서 작정 트위스트를 해서 발에 피피 조개가 걸리기를 바란다고?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뒷발에  잡듯 발에 차이는 피피 조개가  된다.


남편과 아들은 열심히 트위스트를 추고 있고, 나는 끝도 없는 모래밭을 무작정 걸었다. 이렇게 모래밭 위를 걷다 보면 많은 흔적들과 마주치게 된다.


어젯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모래밭엔 끝도 없이 줄지어진 날벌레들의 사체가 끊어지지 않은 끈처럼 이어져 있다. 다가가 벌레들을 자세히 보니 반딧불이다. 이렇게나 많은 반딧불이의 떼죽음은 처음 본다. 그리고 죽은 나비들이 그 반딧불이의 사체 사이사이에 띄엄띄엄 보인다. 모래밭을 걸으며 이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그 흔적을 따라 밤사이 벌어진 일에 대해 상상해 본다.


반딧불이들이 떼 지어 바닷가에 놀러를 왔다. 얇은 초승달이 뜬 밤, 반딧불이는 제 불빛으로 밤 바다를 수놓고 있었다. 그 반딧불이의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꽃이 핀 낮인 줄 착각 한 나비들이 몰려와 반딧불이와 함께 바다 위를 난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춤을 추며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높은 파도가 밀려와 바다 위를 줄지어 날던 반딧불이와 나비를 덮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파도에 삼켜져 바다 위에 떠 있던 반딧불이들과 나비들이 이렇게 모래밭으로까지 떠밀려 온 건 아닐까?


바다는 어제의 아름다웠던 밤 풍경을 혼자만 간직하기 아쉬웠던 게 틀림없다. 바다는 나비와 반딧불이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밤 바다의 흔적을 모래 위에 남겨 둔 건 아닐까?


모래밭을 걸으며 어제 있었을 나비와 반딧불이로 가득한 밤바다의 흔적을 마음에 담는다. 그들의 , 환희, 절망, 두려움, 슬픔을 모두 담아 다시 걷는다.


반딧불이의 긴 행렬이 어디서 끝날지 궁금해 계속 따라가며 걷다 보니 모래밭에 남겨진 여러 가지 흔적들을 마주하게 된다. 물새 발자국, 새벽에 강아지와 함께 나란히 산책을 하던 어떤 이의 발자국, 그리고 잠깐 모래밭에 앉았다 간 고운 새의 흔적까지.


모래와 조개껍데기 사이에서 뒹굴고 있는 깃털 하나를 주웠다. 색이 곱다. 짙푸른 녹색과 샛노랑 색이 어우러진 고운 색의 깃털이다. 모래를 살살 털어내고 바닷바람을 쏘였더니 다시 반질반질 보송보송한 깃털이 되었다. 이 고운 색의 새는 반딧불이 가득한 밤바다를 구경 왔던 것일까? 새는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깃털 하나로 모래 위에 남겨두었다.


내가 걷고 있는  아침 바다의 공기에도 여러 흔적들이 담겨 있다. 바다를 즐기고  사람들의 웃음과 혼자 바다를 걸으며 외로움을 떨친 어떤이의 숨결과 밤바다를 아름답게  놓았던 반딧불이의 찬란한 빛과 바다 위를 날던 나비의 꿈까지.  모든 흔적이 담긴 공기를 가슴 깊이 마셔본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흔적을 담고, 나의 흔적을 남기는 일의 반복이 아닐까? 흔적을 담고, 흔적을 남기고, 그러면서 살아간다


나도 이들처럼 누군가가 담아갈 흔적을 오늘에 잘 남겨두었을까?

오늘의 희열카드—바다에 남겨진 흔적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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