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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10. 2022

호주 겨울, 민들레 나물

아직도 2일이나 7일이 들어가는 날이면 5일장이 섰겠구나 싶다. 내가 자란 안동은 2일과 7일이 들어가는 날짜마다 장이 섰는데 엄마 따라가는 5일장 구경은 어린 나에게 소꿉놀이만큼 재미난 일이었다. 장이 서면 좁은 시골 바닥이 붉은 다라이와 색색깔의 소쿠리에 얹힌 온갖 나물과 야채들로 가득했다. 허리가 굽은, 얼마 남지 않은 이를 내보이며 따뜻하게 웃어주는 할머니들이 집에 모아둔 검은 봉다리를 들고 와서 허리춤에 전대를 두르시고 캐 온 나물과 농사지은 채소, 곡식들을 팔고 계셨다. 장날 만난 채소들은 집에서 농사지은 것들이라 실하고 신선했다. 땅콩도 덩굴이 그대로 달린 채였고, 밤도 금방 가시 움막에서 나와 윤이 반들반들했다. 뿌리가 튼실한 냉이, 도라지, 토란대, 깻잎, 상추... 모든 것이 흙에서 갓 깨어나 흙이 준 싱그러움 그대로였다. 장은 흙냄새, 나물 냄새, 그 냄새를 맡고 달려 나온 사람 냄새로 가득했다.


아쉽게도 호주에서 만나는 나물들은 흙냄새는 모두 사라지고 건조되어 비닐에 꽁꽁 가둬지거나, 냉동되어 숨 막히는 포장 속에 담겨 있다. 어렸을 적 만났던, 흙에서 막 나와 금방이라도 밭으로 뛰어갈 듯 생기 팔팔한 나물들은 없고, 시체가 되어 관 속에 보관된 듯한 나물들만 만날 수 있다. 아쉽다. 흙냄새 나는 나물을 만나고 싶다. 흐벅진 팔뚝으로 뛰쳐나갈 듯한 나물을 잡아채듯 담아주신 시골 아주머니의 손이 그립다. 시체처럼 가지런히 마른 채로 누워있는 포장된 나물을 마트에서 집어야 하는 내 손이 싫다.


호주는 겨울이다. 한국은 여름으로 치닫고, 호주는 겨울로 내달리고 있다. 어제오늘 너무 추워서 한국 겨울을 맞는 느낌까지 들었다. 겨울이 되니 게을러져 정원 가꾸는 일을 자꾸만 미루게 된다. 모든 것이 게을러지는 탓인지 풀도 게을러져 천천히 자란다. 게을러진 날 배려해 주는 것 같아 고맙다. 정원은 아직 밀림이 되진 않았다. 오랜 비로 축축해진 땅이 좀 마를 때까지 기다려줘야 할 것 같다. 잔디 사이로 민들레가 많이 번졌다. 생명력이 강한 민들레는 호주에서 잡초로 여겨지는데, 나에겐 좋은 한 끼 식사 거리다. 잔디를 제때 깎지 못했더니 민들레가 여기저기 무성하게도 자랐다. 손바닥 펼치듯 잎을 쫙 벌리고, '나 여기 있소' 한다. 흙바닥에 누워 나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다.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어."


뿌리는 남겨두면 또 잎이 금방 자라날 테니, 잎만 따서 모았다. 한 양재기 가득 되는 민들레 잎을 데쳐 나물을 무쳐 먹을 작정이다. 비닐에 갇힌 시체 같은 나물 말고, 정말 나물다운 흙에서 막 건진 나물을 먹어볼 드문 기회다. 민들레는 쌉쌀한 맛이 강해 소금물에 좀 담가 두었다. 호주 민들레는 입이 워낙 억세다 보니(야생의 나라인지라 모든 게 억세다.) 데칠 때도 살짝 데치지 않고 거의 삶듯이 데쳐 박박 씻어줘야 한다. 찬물에 헹군 민들레는 물기를 꽉 짜서 마늘, 된장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무쳐주면 근사한 민들레 나물 무침이 된다.


남편도 나도 시골 출신이다 보니 이런 나물 무침 하나면 밥 한 그릇 뚝딱이다. 엄마, 아빠의 입맛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들도 맛있다고 달려드니 한 양재기 가득했던 민들레는 금세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예 잔디를 깎지 않고 계속 버티면 계속 민들레를 무쳐 먹을 수 있으니 밖에서 보이지 않는 뒤뜰 잔디는 계속 깎지 말까 싶은 꼼수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된장과 고추장이 섞여 마늘향과 참기름 향을 입은 민들레 나물 무침이 맛있는 건, 추운 겨울에도 굴하지 않고 잎을 내어 준 민들레의 용기와 생명력 때문이 아닐까? 자신을 가져가라고 잎을 펼쳐 손 흔들어주었던 따뜻함 때문이 아닐까? 추워서 오그라든 손으로도 식구들을 위해 한 잎 한 잎 딴 엄마의 사랑 때문이 아닐까?


민들레 나물 무침을 먹으며 이제야 깨닫게 된다. 내가 어렸을 적 먹었던 장에서 사 온 나물들이 맛있었던 것은 흙을 뚫고 나온 그 나물들의 용기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키운 따뜻함, 누군가의 맛있는 한 끼를 위해 나물들을 굽은 허리로 캐낸 할머니들의 사랑 때문이었구나 싶다.


틀니도 없이,   남은 성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어주시던, 나물  봉다리 가득 담아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건네주시던, 장날   어린 시절의  할머니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오늘의 희열카드 - 민들레 나물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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