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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May 24. 2022

바닥에 떨어진 것들

어릴 때,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들을 보며 저들의 바닥 인생은 어떨까 궁금했다. 내가 바닥에 딱 붙어 기어만 다닌다면 누가 한 번쯤 나를 들어 올려 높은 세상을 구경시켜주길 바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린 난 큰 선심 쓰듯 기어가는 개미를 들어 올려 내 손 위를 기어 다니게 하며 높은 세상을 구경시켜 주었던 적이 있다. 내 손 위에서 한껏 높아져 아래를 보며 개미는 조금이라도 행복했을까?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쓸쓸해 보인다. 제 자리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물건들을 볼 때면 나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주머니에서 떨어진 차 키, 남편이 벗어던진 양말들, 둘째 녀석이 만들어 놀다 구석에 처박힌 종이비행기... 모두 나에게 자신을 일으켜 달라며 소리치는 것 같다. 주머니에서 떨어진 차 키는 떨어지기 무섭게 집어 올려 키 걸이에 걸어둔다. 남편이 벗어던진 양말들도 집어 올려 빨래 바구니에 담는다. 둘째가 만든 종이비행기는 내가 다시 한번 날려 본 후 책상 위에 두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왜 그리도 슬퍼 보일까?




좌골신경통이 도졌다. 일주일에 두 번 하던 필라테스를 게을러져 한 번 하고 말아서인지, 비가 와서 통 걷지 못한 탓인지, 골반 쪽이 아파 통증이 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안 되겠다 싶어 매트를 깔고 누워 폼롤러로 골반 마사지를 해 본다.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사지를 하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바닥 세상이 보인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피아노 밑으로 굴러 들어간 탁구공 하나, 냉장고 밑으로 흘러 들어간 포도 두 알,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줄자까지, 바닥 세상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고요히 내려앉은 먼지들과 뒤엉켜 컴컴한 바닥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하나씩 꺼내 본다.


남편이 거실 벽을 탁구대 삼아 열심히도 연습하더니 그중 하나가 피아노 밑으로 굴러들어간 모양이다. 꺼내 보니 뽀얀 살 위에 파우더라도 입힌 것처럼 먼지로 화장을 하고 있다. 냉장고 밑에서 꺼낸 포도 두 알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건포도가 되어있다. 수분을 모두 잃고 쪼글쪼글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름 사이로 먼지까지 들어 가버린 것 같다. 그렇게 찾던 줄자는 왜 이제야 자기를 꺼내 주었냐는 듯, 못마땅 표정으로 줄을 늘어뜨린 채로 구조되었다. 깨끗이 닦아 반짇고리에 다시 넣었다.


우리 마음에도 바닥이 있다. 어떤 이는 그 바닥을 애써 외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바닥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바닥을 수시로 살피며 떨어진 자신의 조각을 줍기도 한다.


내 마음의 바닥에는 내가 떨어뜨린 무엇이 숨어 있을까?

혹여나 내가 그토록 찾았던 줄자처럼 내가 그토록 바라 왔던 그 무엇인가가 내 마음의 바닥에서 먼지를 꽁꽁 싸안은 채로 나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내 마음의 바닥에는 글쓰기를 좋아했던 스무 살의 어린 내가 있었다. 오랫동안 내 마음의 바닥에서 먼지를 마시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난 글로 무언가를 쓸 만큼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매번 밀어냈다. 글쓰기보다는 눈앞의 취업시험 준비가 더 시급했고, 취업이 된 후에는 결혼이 더 중요했고, 결혼을 한 후에는 육아가 더 중요해서 늘 마음의 바닥에서 먼지에 쌓인 채 나의 구조만 기다리고 있었다.

 

20년이 훌쩍 지나서야 내 마음의 바닥에서 먼지를 잔뜩 안고서 기다리고 있던 스무 살의 나를 일으켜 보았다. 먼지를 탈탈 털고 바닥에서 건져진 스무 살의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행복했다. 그렇게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바닥에서 날 오랫동안 기다려준 만큼 난 스무 살의 내가 고맙다. 먼지가 쌓여 존재조차 잊혀질 수도 있었는데, 그런 날 바닥에서 올려내 준 지금의 내가 고맙다.


우린 어쩌면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도 잊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20년의 세월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 바닥에 가라앉은 그 무엇인가를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닥에 누워서야 가구 밑에 숨어 있던 먼지 쌓인 물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눈앞에 보이는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가끔은 나의 바닥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 마음 바닥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면, 바닥에 떨어져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숨어있던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손을 내밀어 바닥에서 나를 기다리는  다른 나를 일으켜보자.




오늘의 희열카드- 피아노 밑 물건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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