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향기 Jun 03. 2022

어둠의 숨결

에세이

해가 지기 시작할 때부터 해가 온전히 자취를 감추고도 남은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의 모습을 천천히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비한 느낌이 있다.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 죽어보지 않고도 내가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주위에 존재하는 어떤 빛도 용납하지 않은, 가로등도, 핸드폰도, 손전등도 없이 오로지 어둠과 나만 독대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내가 어둠에 휘감기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내가 서서히 어둠에 잠겨가면 난 서서히 내 눈앞에서 내 모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땐 내 존재가 정말 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고요함에 휩싸인다.


해가 지는 호수 앞에 서 있다가 해가 삼켜지는 것을 본다. 해를 삼킨 하늘은 아직 여전히 빛을 내고 있다. 남은 빛까지 소멸하는 순간이 오고, 호수가 머금었던 어둠이 순식간에 나도 삼켜버리면 우린 어둠이 내려앉은 차가운 흙빛 공기 속에서 서로를 대면한다.


눈에 보이는 내 모습도 없고, 귀에 들리는 내 소리도 없을 때, 호수의 숨결과 내 숨결만이 교감을 하는 조용한 순간이 오면 이제까지 내가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나를 유혹한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기 전, 칠흑 같은 어둠에 삼켜진 그 세상은 오롯이 어둠의 숨결을 쏟아내고 있다. 잔잔히 출렁이는 호수의 물결 소리, 바람에 부딪히는 풀잎 소리, 풀잎 사이에 숨어 있던 풀벌레들 소리, 그리고 내 숨결 소리.


어둠이 만들어낸 숨결은 아름답다. 빽빽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던 호수는 어느 여인의 벨벳 드레스처럼 너울거리며 펼쳐지고,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듯한, 어둠이 만들어 내는 실루엣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둠 속에선 내가 잊혀지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우주만 남게 된다.


우주 속에서 너울지다 꺼져버릴 숨결들이 들려오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보지 않고, 나를 듣지 않고, 오롯이 나를 잊을 수 있다. 나를 잊은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나를 있게 한 분을 생각한다.


다시 빛이 비치고, 내 모습이 드러나는 세상으로 들어가면 어둠 속 숨결은 잊은 채, 밝은 세상 속에서 바쁜 하루가 흘러갈 것이다. 그러면 내가 존재하는 세상의 존재도 궁금해지지 않고, 나의 존재조차 궁금해지지 않는 똑같은 일상에 치이다, 진정한 어둠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잠들어 버릴 것이다.


우린 신이 주신 빛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가운데 바쁘게 움직. 신이 주신 어둠도 망각하고 잠드는 매일 같은 매일이 슬프다. 매일 같은 매일이 일상이 되면 우린  숨결과 타인의 숨결이 존재하는 이유조차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빛은 나란 사람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한다. 어둠이 앉아야 할 시간에도 빛의 천사로 가장한 인간의 빛은 더 많은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듯한 착각으로 우리를 내달리게 한다. 더 많은 시간을 손에 쥐게 된 것 같은 착각으로 우리의 시간을 앗아간다.


인간이 만들어 낸 불빛 하나 없는 시골의 어느 길에 서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왜 어둠이 내리는 지를. 어둠이 내릴 때만이 비로소 나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게 되고, 내 주변에 숨 쉬고 있는 것들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신이 주신 어둠만이 존재의 이유를 돌이켜 볼 시간을 내어 준다.


사유의 시간을 빛에 빼앗긴, 불빛 조명 아래 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해가 주어질 때는 해를 머금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해와 나눈 이야기를 어둠과 함께 나누는 어둠이 가득한 밤이 그립다.


오늘의 희열카드- 호숫가 어둠 카드





<사진:나무향기>




이전 12화 바닥에 떨어진 것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