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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Jun 30. 2022

이야기가 있는 삶

친구가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한다. 친구의 친구는 영국 할머니다. 할머니는 아흔이 훌쩍 넘으시도록 건강하게 사시다 얼마 전 돌아가셨다. 생전 90세가 되던 해 아흔 송이의 장미를 들고서 사진을 곱게 찌으시고는 이 사진을 자신의 장례식 초대장 사진으로 쓸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생전의 말씀처럼 내 친구가 받은 초대장엔 아흔 송이의 장미 다발을 들고 있는 아흔 살의 예쁜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외국에서는 그 사람의 삶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는 가장 중요한 날이 바로 '장례식'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집에서 보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더 많고, 장례식도 병원 장례식이라 장례식에서조차 그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볼 기회가 흔치 않은 것 같다. 한국의 장례식을 떠올리면 문상과 곡이 가득한 침울함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런 면에서 외국에서의 장례식은 한국의 장례식과는 많이 다르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호주에서 하는 장례식을 여러 번 가 볼 기회들이 있었다. 호주의 장례식은 고인의 사망을 슬퍼하고 남은 가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에 더해 장례의 많은 부분을 고인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에 할애한다.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가 장례식 초대장에 고인의 사진과 함께 나오고, 장례식 사회자는 고인의 삶에 대한 연설을 한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이 차례로 나와 고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장례식은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의 곡이 가득한 행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어보고 그 사람과의 추억을 짚어보는 중요한 행사이다.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장례식에서도 나눌 이야깃거리가 많다. 친구가 다녀온 장례식에서는 손자녀들이 나와 생전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악에 맞춰 춤까지 추었다고 한다. 약간은 축제 분위기가 나는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누구를 장례식에 초대할 것인지 목록을 다 작성해 두셨고,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은지 글까지 써 두셨으며, 장례식 플랜까지 다 짜 두고 가셨다고 한다. 이야기 가득한 삶을 산 영국 할머니는 장례식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소셜 미디어에 쌓이는 사진들만큼 우린 이야기가 많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이야기도 없이 그저 삶의 파편을 과시하기에만 급급한 것은 아닐까?




내가 사는 골드코스트에는 호주에서 유명한 놀이 공원들이  모여 있다. 우리 집은   '드림월드'라는 놀이 공원 바로 옆에 있다. 그래서 가끔 자이로드롭을 타는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곤 한다. 집이 가까우니 아이들이 어릴  놀이터 삼아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여느 놀이 공원처럼 베트맨이나 원더우먼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놀이 공원 곳곳에 있다.


그때 신기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어느 한국 가족이 놀러를 온 모양이다. 부모들은 잽싸게 아이들을 베트맨이과 원더우먼 옆으로 데려가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라고 재촉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옆에 서서 분주하게 사진을 찍는 부모들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고 정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렇게 사진을 여러 번 찍더니 '바이'라는 한 마디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호주 부모들은 달랐다. 베트맨이나 원더우먼이 지나가면 사진을 찍기보다는 아이들에게 가서 말을 해 보라고 한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베트맨과 원더우먼에게 달려가 자신은 어디에 사는 누구라며 소개를 하고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본다. 정말 베트맨인지, 분장을 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린 건지, 날아갈 수 있는지...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부모들은 재미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자녀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사진을 찍는다.


호주 부모들은 사진을 남기는 것보다 이야기를 남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녀들의 모습이 사진으로만 기억되기보다 자녀들이 누군가와 나누는 이야기를 기억하길 더 원한다. 이것이 이야기가 있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호주 사람들의 마인드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장려하는 교육과 그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부모는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을 잘 들어주고, 이야기해 주고, 기억해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시작은 호기심이다. 내 삶에서도 호기심을 놓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테고, 타인에 대한 호기심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런 따뜻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삶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드는 삶이 되지 않을까.


<사진 출처: Trung Bui Viet/Flickr, CC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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