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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향기 Sep 07. 2022

23. 춤추는 빨래처럼

소설 '춤추는 빨래처럼' 연재

바람이 분다. 빨래 널기 좋은 날씨다. 옷자락 끝을 집게에 집어 널어놓으니, 공기를 품고 빵빵해진 빨래들이 바람에 춤을 춘다. 어머님 옷, 아버님 옷, 재훈 씨 옷, 이안이 옷, 내 옷까지 서로 손이라도 잡고 춤을 추는 모양새다. 오늘은 빨래가 잘도 마르겠구나 싶다. 춤추는 빨래를 빨랫줄에 남겨두고 난 모처럼 이안이 없이 장개선 아줌마를 픽업하러 갔다.


"서은 씨 왔소? 오늘 웬일로 이안이가 안 보이오?"

"저 오늘 혼자예요."

"이안이는?"

"지금 젖 떼는 중이라 어머님이 두고 가라고 하셔서요. 어머님한테 맡겨두고 나왔어요."

"그리쿠나. 젖 떼는 것이 고저 마이 힘드지 않소? 누기는 약도 먹잖소."

"전 젖이 부족했어선지. 그렇게 힘드진 않네요. 2-3일 정도는 젖몸살처럼 아프더니 이제 점점 쪼그라들고 있어요. 글래머였던 시절은 이제 다 가버렸죠."

"농담도 잘 하오."

"오늘은 칵만(Kagman) 아주머니네 가는 거죠?"

"그리치. 거기 가면 코코넛 물 또 먹게 생겼소."

칵만 아주머니는 연변에서 이곳을 오신지 20년이 넘으셨지만 영어를 잘 못하셨다. 많으신 연세에도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신 분이라, 가면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오게 된다. 아주머니는 갈 때마다 코코넛을 따서 빨대를 꽂아주셨는데, 그 밍밍하면서도 미원탄 듯 달찌근 한 코코넛 물이 더운 여름 날씨를 잊게 해 주었다.

칵만은 꽤나 먼 곳이라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모처럼 이안이 없이 홀가분하게 장개선 아줌마와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저 어제요. 처음으로 시어머니한테 제가 상처받았다고 이야기했어요."

"처음이라 말이오?"

"네, 처음이요. 결혼한 지 2년이 넘었는데, 어머님한테 처음으로 제 감정에 대해 말한 것 같아요."

"시어머니가 좋아하셨겠구만."

"네?"

"누가 나한테 솔직한 감정을 말해 주면 그건 친구 하자는 이야기 아니오. 그러니까니 그건 좋은 것이디.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보시오, 누가 그런 마음을 이야기라도 하겠소?"

"글쎄요. 어머님이 좋아하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전 좋았어요. 목적은 정말 어머님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사실 그동안은 수천 번도 어머님을 버렸거든요. 제 마음에서요. 그래서 죄책감도 많았어요. 어쨌든, 제가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이니까요. 그동안 전 정말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아무 말 없이 마음으로 여러 번 어머님을 포기했어요.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근데 이안이를 낳고서 저도 언젠가는 시어머니가 될 텐데, 미래의 며느리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해 보니, 무서운 거예요. 안 될 일이라고 생각됐어요. 제가 꼭 시어머니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를 포기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잖아요. 그래서 용기를 내 보기로 했죠. 어머님을 얻을 마음으로 말을 해야겠다고요. 그리고 처음으로 어제 어머님에게 섭섭한 제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잘했구만. 시어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구만."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그냥 듣고만 계시고는 생각이 많아지셨는지, 집으로 들어가시더라고요. 어머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그동안 귀머거리, 벙어리인 줄로만 알던 며느리가 갑자기 섭섭하다고 했으니까요.

그래도 어제 저녁 먹을 때, 어머님이 절 은근히 챙겨주셨어요. 말하지 않으셔도 느껴지더라고요."

"글티. 말 안 해도 느껴지는 게 있디. 어머님이 말을 잘할 줄 몰라서 그러티, 좋으신 분이오. 동네에 힘든 사람들 보면 잘 챙겨주지 않소. 그런 거 아무나 못하오. 거창하진 않아도 남 눈에 띄지 않게, 작게 챙겨주는 일이 더 힘든 일이거든. 그래서 내 서은 씨 어머님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디."

"네, 좋은 분이세요. 어머님도 며느리를 맞은 게 처음이시라 어떻게 절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셨겠죠. 이해는 해요. 사실 저도 며느리가 처음이고, 어머님도 시어머니가 처음이라 서로 많이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는데, 제가 그걸 잘 못했던 거죠."

"그래도 서은 씨가 어머님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잖소. 그거이 참 잘한 거이디."

"사실 그동안 어머님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은 건 사실이에요.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게 병으로 오기도 했고요. 하지만 어머님을 용서하고 싶었어요."


차가 달리는 흙 길 옆으로 사탕수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파랗게 펼쳐진 사탕수수밭을 먼 눈으로 바라보며 아스라이 생각에 잠기던 장개선 아줌마가 말문을 여셨다.


"인간이 누구를 용서한다는 거. 그거이 참 아름다운 일이디 않소?

사람들은 말이오, 그 아름다운 것을 찾기 위해 한평생을 보내기도 하고, 제 모든 힘을 쏟기도 하디. 그거이 미술이 건, 음악이 건, 글이 건 간에, 모두 아름다움을 짓기 위해 인생을 사는 거이디. 근데 그 아름다움이란 말이디, 결국 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오."

"신의 모습이요?"

"신의 모습은 이 세상에 어디에나 나타나 있디 않소. 파란 하늘에도, 저 넓은 바다에도, 작은 꽃에도, 신의 모습이 묻어나 보이오. 그 모습을 찾아 아름다움을 지어가는 게 사람의 인생이라 생각하오.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그리도 아름다운 건 말이요, 그 그림이 신의 모습을 한 사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오. 베토벤의 음악이 숭고한 것도, 신의 노래를 찾는 인간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고. 톨스토이의 작품이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것도, 신의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들을 썼기 때문이디 않을까 생각하오.

근데 우리처럼 비범하디 않고 고저 평범한 사람들도 신의 모습을 가질 수 있디. 그냥 우리의 일상에서 말이오. 누군가를 용서하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대단한 것으로 말이오. 그저 평범한 우리 일상으로도 신의 아름다움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오. 난 아무리 비천한 인간도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거든."

"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나오디 않소. 결국 인간은 신을 닮게 되어 있소. 신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졌으니까 말이디. 얼마나 신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이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못하오. 신을 닮아가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디. 이 세상엔 이상한 신들이 판을 치고 있어 우리가 닮아야 할 신의 모습이 가려져 있는 게 아쉽긴 하지... 그래도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 나는 생각하오. 나도 간절히 누군가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면 한 적이 있디 않은가 하고 말이오. 내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건, 신을 닮아갈 기회를 잡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오."

"그렇군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보진 못했어요."

"서은 씨 마음이 그리 동한 것도, 어찌 보면 우리가 다 신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지 않겠소?"


사탕수수밭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장개선 아줌마의 말이 푸르게 펼쳐진 사탕수수밭처럼 내 머리를 푸르게 채우고 있다.

멀리서 머리가 하얀 칵만 아주머니가 우리 차로 손짓을 하신다.

"벌써 다 왔구만. 늙은이가 너무 말이 많았소. 어서 내려야겠네. 저 노인네 우리 기다리고 있었구만."

칵만 아주머니는 여느 때처럼 코코넛 두 개를 다듬어 구멍을 내고 빨대를 가지런히 두 개 꽂아 놓고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며 다시 펼쳐진 사탕수수밭은 오후 햇살에 꿀색을 담은 푸른빛으로 변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용서라는 거요. 인간이 인간을 용서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불가능하잖아요. 신도 아닌데 말이죠. 근데 그 용서라는 건 사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만 가능한 것 같아요."

"한계라..."

"전 어머님의 DNA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거든요. 그분이 살면서 겪으신 모든 경험들도 모르고요. 그런 것들이 어떻게 지금 그분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죠. 그분의 감정, 생각들이 지금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분의 동기, 의도, 욕망도요."

"그러티."

"누군가의 한 행동은 그 모든 게 복합적으로 유기되어 생겨난 하나의 결과물이잖아요. 그래서 어머님의 행동 이면에는 제가 헤아리지 못한 무수한 DNA와 경험, 지금 겪는 감정과 생각의 소용돌이, 동기와 욕망의 충돌이 있었겠죠. 그런데 전 제가 받은 상처되는 말과 행동만 본 것 같아요."

"그런 걸 다 헤아릴 사람이 어디 있겠소. 상처를 받으면 상처에만 신경 쓰이는 법이지."

"제가 그랬어요. 하지만 헤아리지 못한다면, 제가 헤아릴 수 없다면, 그것이 제가 조금이라도 어머님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어머님이 제게 한 행동과 말들은 분명 상처였지만, 그분도 어쩔 수 없는, 자신도 모르는 그 이유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어머님이 준 상처를 묵인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는 거죠.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겪는 감정의 고통을 나에게서 털어버린다는 의미에서 용서를 하고 싶어요.


이유를 다 헤아릴 수 없기에 누군가를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거, 정말 아름다운 일인 것 같아요.

……

사탕수수밭이 정말 끝도 없네요."


"참 아름답소."




아침은 햇빛으로 세수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다. 햇빛에 맑게 씻은 얼굴들이 자기 좀 봐 달라며 나에게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다. 디디는 내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어디선가 쪼르르 달려와 바닥에 배를 내고 누워 자기를 만져 달라고 한다. 미간을 문지르고 턱을 긁어주고 배도 만져주면 만족스러운 듯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감고선 내 손길을 즐긴다. 그러곤 다시 일어나 내 다리를 비비고 밥을 챙겨둔 그릇 쪽으로 가 나를 한번 보고 고맙다는 눈인사를 던지고 아침을 먹는다. 동박새가 촐랑거리며 망고나무 사이에서 널뛰기를 한다. 햇살에 한층 더 붉어진 부겐빌레아 꽃잎에 눈이 시리다. 빨래를 돌리는 세탁기 소리와 압력밥솥의 추 흔들리는 소리가 분주한 아침을 알린다. 벌써 깨서는 '엄마, 엄마'하는 이안이의 꼬물진 아기 말소리가 아침 공기 사이로 흐뭇하게 흐른다.


아침이 주는 모든 경건함과 깨끗함, 활기참을 내 몸 가득 불어넣는다. 아침 공기를 가득 담고 춤추는 빨래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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